본문 바로가기
책 이야기

[케리 슉, 크리스 슉] 당신이 메시지다 Be the Message

by manga0713 2015. 4. 8.

 

 

 

 

"그릇된 선택을 내릴까 두려워 어떤 선택도 내리지 않으려고 하는가?"

그렇다. '두려움'이다. 그릇된 선택으로 그릇된 결과를 낳을까 염려하는 '두려움'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달란트를 땅에 묻게 하였다.

염려는 염려를 낳고 두려움은 절망을 낳았다.

 

"삶의 메시지를 계좌로 이체할 수는 없다. 삶의 메시지는 삶으로 살아 내야만 한다."

나는 모든 일이, 소원하는 , 시급한 것까지도, 저절로 이루어지길 바랐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고 나는 하나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한 알았다.

 

나의 짧은 요구에 기적이 계좌이체 되기만을 바랐던 것이다.

"삶의 메시지는 삶으로 살아 내야만 한다." 것을 애써 외면하였던 것이다.

 

나는 소극적이 아닌 가면을 거짓 인생을 살아 것이다.

"내면의 진짜 모습과 브랜드 이미지가 다르면 진정성의 가면은 결국 벗겨지게 되어 있다. 암스트롱과 닉슨의 결말이 증거다. 언젠가는 진짜 모습이 드러나고 만다." 저자의 말처럼 나의 가면은 결국 벗겨지고 말았다. 나의 적나라한 모습이 밝음에 드러나고야 말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신과 나는 복음이다."

 

내가 복음(기쁜 소식) 것이다.

거창하게 이루고 거창하게 나누고 시원스레 떠벌리는 것이 기쁜 소식이 아니라, 앞의 , 앞의 사람, 속의 울림을  외면 않고 나서는 것이 기쁜 소식인 것이다.

 

이제까지는 심지도 않고 열매를 바랐다.

이제까지는 키우지도 않고 튼실하기를 바랐다.

이제까지는 복권 인생을 살아 것이다.

 

복권을 내어 던지고, 밑에 숨겨 달란트를 꺼내 나서야겠다.

가면 인생이 아닌 쌩얼로

거짓 브랜드가 아닌 적나라한 나의 모습을 그대로 내어 맡기며

앞의 , 앞의 사람, 속의 울림을 나서야겠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당신이 메시지다 Be the Message" 숨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밖으로 나오라 촉구 합니다.

"당신이 메시지다 Be the Message" 어줍잖은 지식의 말잔치에서 뛰쳐나와 행동하라 촉구 합니다.

"당신이 메시지다 Be the Message" 자신이 이루어야 한다는 오해에서 벗어나라 촉구 합니다.

"당신이 메시지다 Be the Message"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즉각 반응 것을 촉구 합니다.

 

그리스도인들 모두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다음은 책의 밑줄 부분 입니다.

 

 

Foreword

 

우리는 약점을 털어놓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약점을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절뚝거리는 자만이 하나님께 위대하게 쓰일 있기 때문이다.

 

성공담을 이야기하면 주목을 있지만 선한 영향력을 끼치려면 자신의 실패와 약점을 인정하고, 사람들에게 실패를 기적으로 바꾸실 있는 하나님을 보여 주어야 한다. [ 워렌]

 

 

말이 아니라 삶이다

 

우리는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수많은 가운데 하나로 전락시켰다.

 

말만 많아지고 예수님을 실제로 경험하는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많은 '영적' 언어들이 딱히 삶으로 전환되고 있지 않다. 우리는 메시지를 터득했지만 삶은 전혀 터득하지 못했다.

 

"세상에 문제가 너무 많아. 어떻게든 조치를 취해야 텐데." 이렇게 말하면 마치 내가 세상을 진정으로 걱정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진정으로 관심이 있는 것처럼 들린다. 실제로 그런 일에 참여하지는 않으면서 말로만 떠들 때가 너무 많다는 것이 문제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교회는 종교 단체가 아니라 망가진 삶이 회복되는 곳이다.

 

숱한 말과 말씀은 다르다. 모든 말은 지식을 키워 있지만 오직 말씀 예수 그리스도만이 삶을 변화시킬 있다. ~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본받도록 부름을 받았다. 앵무새처럼 성경 구절을 되뇌고 유행하는 종교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행동으로 옮기고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침묵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속삭이심이 들려올 때까지 말을 멈추는 법을 배워야 한다.

 

결국 세상과 당신의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언제나 우리의 행동은 우리 내면의 진실을 말해준다. 행동이 외치는 소리는 너무도 커서, 이미지를 통제하려는 모든 노력을 헛수고로 만든다. 내면의 진짜 모습과 브랜드 이미지가 다르면 진정성의 가면은 결국 벗겨지게 되어 있다. 암스트롱과 닉슨의 결말이 증거다. 언젠가는 진짜 모습이 드러나고 만다.

 

우리의 행동은 주변 사람들에게 소리로 메시지를 외친다.

 

삶의 메시지는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 중에서 가장 강력하다. 사람들은 우리가 삶으로 전하는 메시지를 유심히 보고 듣는다. 사람들은 우리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아니라 전하지 않으려고 해도 전해지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인다. 사람들은 우리가 일상적인 행동을 통해 전하는 메시지를 절대 놓치지 않는다. 현상은 자녀 양육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과거가 어떻든 오늘 우리는 세상에 어떤 삶의 메시지를 전할지 선택할 있다. 과거에 어떤 죄와 실수를 저질렀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나머지 이야기만큼은 있다.

 

우리가 아무리 원하는 이미지를 내세워도 결국 우리의 삶이 진짜 메시지를 말한다.

 

복음의 메시지는 하나의 삶이요 명의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삶이 복음이다.

 

"너희는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 16:15) 라고 말씀하신 것은 성경책으로 설교를 하라거나 신약의 서간문을 가르치라는 뜻이 아니었다. 당시는 아직 신약이 쓰이기 전이었다. 예수님은 눈으로 것을 증언하라는 뜻이었다. 그들이 눈으로 것이 무엇인가? 바로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었다.

 

당신과 나는 복음이다.

 

복음이 되려면 반드시 자신의 세상에서 나와 다른 사람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자신의 안전지대에서 벗어나 누군가의 고난과 혼란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정체성, 우리가 하는 , 우리가 예수님을 주변 세상에 보여 주는 방식, 그것이 바로 복음이다.

 

 

당신이 메시지다

 

하나님은 당신의 주변 세상을 위해 당신을 독특한 메시지로 빚고 계신다.

 

하나님은 즐거운 상황을 통해서는 속삭이시고 양심을 통해서는 말씀하시지만 고통을 통해서는 크게 외치신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깨우기 위한 하나님의 확성기다. [C. S 루이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누군지 솔직히 돌아보면 십중팔구 사람은 우리에게 조언이나 해법, 치료약을 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따스하고도 부드러운 손으로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져 사람이다.

 

고통이 우리의 속으로 침입할 ①하나님은 경험을 통해 내가 무엇을 배우기 원하실까? 하나님이 경험을 어떻게 사용하여 나만의 독특한 메시지를 빚어 주실까? ③이 경험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어디로 이끌고 계신가? 질문을 던지면 중요한 통찰을 얻을 있다.

 

때로 고통스러운 경험은 어쩔 없이 대상을 마주하게 만든다. 그때 의외로 우리가 대상을 담대하게 마주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사람은 힘든 상황에 처하기 전까지는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확성기는 우리를 그런 진실의 순간으로 안내한다.

 

고통은 남들의 고통을 깊이 알고 공감하기 위한 훈련 과정이다.

 

고통 중에 우리는 자신만의 독특한 교훈을 얻으며, 교훈은 자신만의 독특한 삶의 메시지로 녹아들어 간다. 이렇게 각자의 배움은 모두 다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가지 공통점은 있다. 자신의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새롭게 경험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요셉의 고통을 없애 주시지 않았다. 대신 요셉의 은사인 해몽을 사용하여 바로의 궁전으로 가는 길을 여셨다.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 요셉의 은사를 가동시키셨고, 은사는 그를 신하로서 오를 있는 최고의 자리까지 단숨에 끌어올렸다.

 

고난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행동을 촉구하고 계시는지 알아내야 한다.

 

벽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당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찬찬히 뜯어보기를 바란다. 때로 고통은 하나님이 우리 속에 메시지를 쓰기 위해 사용하시는 잉크다.

 

가장 강한 삶의 메시지는 가장 실패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실패와 약점을 감추려고 하지만 우리가 숨기려는 실패로 인해 오히려 사람들이 우리에게 다가와 복음에 귀를 기울인다.

 

약점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이 인간이지만 약점을 솔직히 드러내면 약점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우리 모두에게는 살면서 저지른 실수로 긁히고 까진 흔적이 남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상처를 뚫고 들어가 우리 안의 진정한 가치를 보신다. 하나님은 상처가, 비슷한 아픔을 지닌 사람들에게 소중한 삶의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아신다. 그러니 살면서 어떤 실수와 실패를 경험했던 간에 받아들이고 승화시키라. 아픈 경험을 두고두고 곱씹지는 말되 부정하지도 말라. 하나님이 영역에서 당신을 가장 크게 사용하실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그가 ' 없는' 일이 아니라 그분이 '하실 있는' 일을 바라보면서 강하고 담대한 생각을 품으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여호수아 자신의 제한된 시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무한한 시각을 품으라는 말씀이다. 시각을 바꾸면 모든 것이 바뀐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격려의 말씀을 들은 뒤에도 물리적 상황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 하나님은 "강하고 담대한 기분을 느껴라" 아니라 "강하고 담대하라"라고 말씀하셨다. 용기는 자신감이 충만할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없고 두려울 발휘하는 것이다. 스스로는 자신감이 없어도 용기 있게 행동하면 하나님이 능력으로 함께해 주신다.

 

때로 하나님은 길을 열어 주기 전에 먼저 믿음의 발을 요구하신다. 그럴 우리는 약하고 두려운 가운데서도 과감히 발을 떼어야 한다. 과감히 강물 속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기적을 보게 된다.

 

우리 약함의 메시지가 하나님의 손에 놓이면 최고의 순간으로 변한다. 자신의 약함이 창피해서 감추려고만 하고 있는가? 약해서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우리의 실패가 하나님께 쓰일 있도록 인정하고 고백하면 하나님이 우리 삶의 메시지로 바꿔 주신다. 하나님은 수치를 승리로 바꾸실 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하나님의 속삭이심을 들으려면 일상의 소음에서 벗어나 경건한 침묵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내야 한다.

 

동양의 명상은 마음을 비우는 시도이고, 기독교의 묵상은 마음을 채우려는 시도이다. 개념은 전혀 다르다. [리처드 포스터]

 

하나님의 속삭이심을 듣는 것은 정해진 행사보다 삶의 방식에 가깝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의 임재에 의식적으로 집중하는 것이다.

 

거룩한 침묵은 영혼을 여는 것이다.

 

우리 속에 떠다니는 소음을 줄이고, 기대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속삭이심에 귀를 기울이면 우리의 귀가 속삭임을 듣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음성을 따라가면 우리의 세상이 진동한다. [ 하이벨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바로 당신

 

(거룩한 동요를 감지한 요나단에게는) 하나님이 일을 하실 있다고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믿음에서 행동까지 나아가는 것이 중요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적선보다는 기회를 찾고 있다.

 

 

 

예수님의 삶이 복음이다

 

세상에 대한 시각은 '세상 우리' 보다는 '세상과 우리' 되어야 한다. 외에 다른 시각으로는 우리의 메시지가 세상 속을 파고들 없다. 대결 구도로 세상을 바라보면 우리가 연결되려고 하는 사람에게서 오히려 분리될 수밖에 없다.

 

알다시피 모든 종교의 중심에는 (karma)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우리가 내보내는 것이 우리에게 돌아온다는 개념입니다. 눈에는 , 이에는 이가 그것이죠. 물리학 법칙에서도 모든 작용에 동일한 크기의 반작용이 있다고 말합니다. 나는 우주의 중심에 업이 있다고 절대적으로 확신합니다. 그런데 개념을 뒤집는 은혜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U2, 보노]

 

은혜는 베푸는 사람을 치유하는 선물이다.

 

은혜는 남들과 자신을 변화시키는 선택이다.

 

은혜는 세상에 예수님의 진짜 모습을 보여 준다.

 

우리 삶에 깊숙이 열정적으로 참여하시는 하나님. 개념은 기독교를 여타 종교와 완전히 구별시키는 요인이다.

 

우리 삶의 메시지는, 단순히 '좋은 ' 넘어 허리케인처럼 놀라우신 예수님을 세상에 비추는 거울이어야 한다. 정죄하기는커녕 해방시키시는 예수님을 세상에 비추는 거울이어야 한다. 냉담하기는커녕 열정적으로 쫓아오시는 예수님을 세상에 비추는 거울이어야 한다. 불신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불신에 대해 의문을 품게 만들어야 한다. 나머지는 하나님이 알아서 주실 것이다.

 

 

지금 있는 곳에서 첫발을 내딛으라

 

베드로는 제자들이 기도하다가 성령을 받은 다락방을 나와 앞에서 즉시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당신과 나도 그렇게 시작해야만 한다. 우리 집에서, 우리 마을에서, 우리 도시에서 시작해야 한다. 우리의 가족과 이웃을 건너뛰어서는 곤란하다.

 

첫걸음을 떼기가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을 , 해야 일의 크기에 비해 우리 자신이 너무도 연약하게 느껴질 , 우리의 문제와 약점만 눈에 들어올 , 그럴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걱정하지 말라.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내게 속한 것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가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 우리가 내리는 선택은 앞으로 수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좋은 선택이든 나쁜 선택이든 우리의 선택은 연못의 물결처럼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피할 없는 현실이다. 혹시 그릇된 선택을 내릴까 두려워 어떤 선택도 내리지 않으려고 하는가? 하지만 선택을 내리지 않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다. 따라서 싫든 좋든 우리 삶의 메시지가 일으키는 물결은 수세대를 넘어 끝없이 퍼져 나갈 것이다.

 

먼저 주변에서 도와야 일을 찾으라. 그러고 나서 지속 가능한 변화를 이끌어 내겠다는 생각으로 팔을 걷어붙이라. 도와야 일을 찾아 도우라. 바로 이것이 메시지가 되는 것이다.

 

삶의 메시지를 계좌로 이체할 수는 없다. 삶의 메시지는 삶으로 살아 내야만 한다.

 

오늘 눈을 크게 뜨고서 변장하신 예수님을 찾고, 그분을 찾으면 사랑을 표현하라. 그러면 기적을 경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