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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사노 요코] 사는 게 뭐라고

by manga0713 2016. 9. 14.

[표지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장모님께서는 정기치료를 받으실 때마다 치매검사 받는 역정을 내실 정도로 싫어 하신다.

가만히 여쭤보니 사노 요코의 증언처럼 "유치원생들이 앞다투어 맞힐 같은 문제가 나왔다. 그런 다음 MRI인지 뭔지 하는 로켓 같은 기계에 들어갔다." 이랬던 것이다.

 

불안과 불쾌가 섞여 불안해지고, " 일들이 그래서 그런거였어, 그렇지 않은 그렇지." 혼란만 커지는 것이 속상한 거였다.

 

말씀을 들으며 돌아가신 엄마도 그랬겠구나 뭉클 했었다.

 

사람은 오늘을 살아갈 밖에 없기에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은지 다른지 구분할 필요를 느끼며 살아가고 살아낸다. 그래서 항상 나는 같은 모습일 것이라는 생각과는 다른 나의 모습을 느끼거나 전해 들으면 못내 속상하고 두렵고 황당한 것이다.

 

"늙으면 다들 이렇게 변하는 것일까.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말처럼, 나이 먹어 아니 늙어 속의 오늘을 사는 모습을 사노 요코는 수다스럽게 풀어낸다.

(마치 우리 장모님, 수다를 풀어낼 수단이나 상대가 엷어져 외로울 장모님을 뵙는 같다.)

 

수다 속에 묻혀 있다가 잠시 빠져 나와 친구의 입버릇 같은 말을 떠올리며 웃음짓는다.

 

"인생 있어. 가는거야!"

 

그래. 사는 뭐라고…… ^^

 

마지막 부분에서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자신이 죽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가까운 친구는 절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죽음은 내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찾아올 의미를 가진다." 사노 요코의 말엔 숨을 멈추고 노려보기 까지 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순간까지 가는 순간들을 솔직하게 보여주고 유쾌하게 풀어내 사노 요코에게 감사를 드린다.

 

 

다음은 책의 밑줄 부분이다.

 

역사상 최초의 장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세대에게는 생활의 롤모델이 없다.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거리며 어떻게 아침밥을 먹을지 스스로 모색해나가야 한다. 저마다 각자의 방식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가족은 텔레비전임에 틀림없다.

 

가장 비참한 속에 익살이 숨어 있다.

 

어쩌면 섣달그믐도 가족도 해체되어가는지도 모른다.

 

어째서 훌륭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기분이 가라앉는 것일까.

 

나는 항상 음식을 똑같이 만들지 못한다.

 

일본의 맛있는 음식은 거의 술안주다.

 

늙으면 다들 이렇게 변하는 것일까.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한국드라마는) 스토리도 대부분 억지로 맞춰서 개연성이 없다. 보고 있으면 헛웃음이 나온다. 그런데도 행복하다. 엄청나게 행복하다. 잘난 사람들은 모두 현상을 분석하려 들지만 나는 그러지 않는다. 좋아하는 이유 따위 없다. 그저 좋은 것이다.

 

욘사마가 나타날 때까지 이웃 나라는 내게 색깔이 없었다. 흑백이라는 색조차 없었다. 생각하면 오로지 마음이 무겁고 좌불안석이었다. 이웃 나라는 두꺼운 솔로 빈틈없이 먹칠한 색깔이었다.

 

아줌마들은 스스로 한국 드라마를 발견했고, 땅속 마그마처럼 쓰나미처럼 우르르 몰려들어 한류를 띄웠다. 그러고는 창피고 체면이고 아랑곳하지 않고 흠뻑 빠져서 일본을 바꾸어 놓았다. 외교관도 훌륭한 학자도 예술가도 못한 일을 아줌마들이 해냈다.

 

한국 드라마는 나를 좌불안석에서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행복하게도 해주었다.

 

이성은 모순을 허락하지 않지만 감성은 모순의 마그마다. 무엇이든 들어오라 어서 들어오라.

 

아줌마들은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살아와서 사회성과 객관성이 거의 없다. 사회성과 객관성으로는 가족을 지키지 못한다.

 

"한국은 번도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인의 정은 내부를 향해 있고 애증도 안에서 소비되니까 외부로 나갈 여력이 없는 것이다.

 

브라운관 새빨간 거짓말에 이렇게 마음이 충족될 몰랐다. 속아도 남는 장사다.

 

나는 생각한다. ~ 패전 후의 혼란기를 어떻게든 빠져나올 있었던 것은 체면 따윈 개의치 않는 아줌마 파워 덕분이었다고.

 

게다가 사용 설명서의 문장은 외계어다.

 

휴대전화에는 분위기의 커뮤니케이션이 없다.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단지 빨갛고 네모난 기계만이 존재할 .

 

나는 문자를 통해 실체 없는 인간과 나누는 대화의 가벼움과 편안함을 깨달았다.

 

야무지게 사는 편이 행복한걸

 

나는 깨달았다. 사람을 사귀는 것보다 자기 자신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나는 스스로와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다. 그것도 60년씩이나.

 

살날이 얼마 없으니 어린아이처럼 살고 싶다. 생각해서는 일을 생각하고 싶다.

 

있잖아, 인생이란 이렇게 하찮은 일이 쌓여가는 것일까?

 

요즘은 개를 산책시킬 안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 지구는 망해가고 있다. 생명체로부터 본능을 빼앗으면 끝장이다. 인간의 욕구는 커져만 가는데 본능은 거의 죽어가고 있다. 본능 속에 논리를 품는다는 점이 동물과 인간의 차이다. 욕망은 권리가 아니다.

 

냄비도 텔레비전 앞에서 닦는다. 언젠가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닦은 냄비가 옆에서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무릎 위의 반쯤 닦다 냄비도 같이. 그때는 조금 쓸쓸했다. 정도로 텔레비전이 재미있냐고? 하나도 재미없다.

 

텔레비전은 정말로 국가의 비밀 정책일지도 모른다.

 

집에 손님이 와서 현관에 신발이 산더미처럼 흩어져 있었는데, 프라다의 빨간 상표가 붙은 구두가 있었다. 누구냐 건방진 녀석은! 알고 보니 것이었다. 이런 해서는 되는 일이다. 슬프다.

 

프로는 곳을 바라본다. 건너편의 희망을. 인생은 도중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 눈앞의 욕망에 달려들어서는 된다. 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며 현재를 성실히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나는 마작 채널을 계속 시청했다.

 

생활은 수수하고 시시한 일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런 자질구레한 없이 사람은 살아갈 없다.

 

동년배끼리 모이면 이거, 그거, 저거, 오해, 착각, 반쯤 죽은 사람들의 모임이 된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재규어 대리점에 가서, 매장에 있던 잉글리시 그린의 차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주세요."

 

남은 날이 2년이라는 말을 듣자 수년 동안 나를 괴롭힌 우울증이 거의 사라졌다. 인간은 신기하다. 인생이 갑자기 알차게 변했다. 매일이 즐거워서 견딜 없다.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자유의 획득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자신이 죽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가까운 친구는 절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죽음은 내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찾아올 의미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