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말씀 : 잠언 14장 1-9절

1.지혜로운 여인은 자기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 2.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여도 패역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멸하느니라 3.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자기를 보전하느니라 4.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5.신실한 증인은 거짓말을 아니하여도 거짓 증인은 거짓말을 뱉느니라 6.거만한 자는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거니와 명철한 자는 지식 얻기가 쉬우니라 7.너는 미련한 자의 1)앞을 떠나라 그 입술에 지식 있음을 보지 못함이니라 8.슬기로운 자의 지혜는 자기의 길을 아는 것이라도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은 속이는 것이니라 9.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느니라

지혜로운 사람 (잠언 14장 1-9절)

< 성경 원리대로 표현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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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짓말도 주의해야 하지만 거짓 증거는 더 주의해야 한다. 특히 인터넷을 통해 남의 사생활에 대해 실제 상황과 맥락도 모르면서 마치 확신하듯이 뒤에서 익명으로 개인의 인격을 난도질하는 것은 교만하고 비겁한 모습이다. 인터넷 댓글은 깨우침을 주는 지식의 보고도 되지만 인격을 살해하는 흉기도 될 수 있다. 악성 댓글은 ‘자유로운 의사 표현’이 아니라 ‘악의적인 거짓 증언’이다. 나의 인터넷 댓글도 내 입에서 나오는 말처럼 여기고 성경 원리대로 표현하려는 태도가 지혜롭고 복된 태도다.

< 지혜로운 사람 >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믿음의 기초 위에 지혜로운 삶도 더해야 한다. 믿음은 있는데 절제, 이웃 사랑, 복된 언어, 겸손이 없다면 그 믿음은 빛을 잃는다. 믿음과 지혜로운 삶은 관련이 깊다. 믿음을 가진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1. 땀 흘려 세우는 사람

 본문 1절에서 ‘지혜로운 여인’은 지혜를 의인화한 것이다. 지혜란 자기 집을 세우고 미련함이란 자기 집을 허무는 것이다. 집을 세운다는 말은 가족을 세워준다는 뜻도 포함한다. 가족은 서로 섬겨주고 인정해주고 서로의 아픔을 감싸주며 하나님 외에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야 하는 존재다. 가족이 내 사랑을 먹고 배부르게 하라. 남에게 예의를 지키고 잘하는 것 이상으로 가족에게 잘해주면 얼마나 행복한 가정이 되겠는가?

 집을 세울 때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땀이다. 땀을 흘릴 줄 알아야 많은 것을 얻는다. 본문 4절을 보라.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소가 있으면 구유가 냄새나고 더러워져도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까 소가 있는 것이 낫다는 암시다. 너무 깨끗한 것만 좋아하지 말라. 냄새나는 일이나 환경도 거부하지 말라. 해야 할 일이라면 더럽고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아야 복을 받는다.

 또한 일할 때 힘들다고 도중에 포기하지 말라. 살을 뺄 결심을 했으면 계속 운동하면서 식사량을 줄여야 한다. 좋은 일을 결심했으면 계속해야 효과가 있다. 말은 보통 서서 잔다. 앉아 있는 말은 대개 곧 죽을 말이다. 성도가 앉아 있기만 하면 영혼도 죽고 신앙도 죽고 행복도 죽는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힘든 일도 과감히 선택하라. 직장을 선택할 때도 볼품없는 직장을 선택해 일으키는 꿈도 꾸면서 소수가 가는 길을 선택해 다수가 가는 길로 만드는 멋진 삶을 살라. 즐거움을 많이 누리기보다 책임을 많이 지려는 인생이 결국 성공한다.

2. 정직하게 행하는 사람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고 패역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멸한다(2절). 믿음은 언행이 일치하는 정직한 행동을 낳는다. 성도는 자기 믿음을 불신자들에게 진실한 행동으로 보여줄 책임이 있다. 그래서 약속도 잘 지켜야 하고 좋은 의도로 하는 백색 거짓말도 최대한 삼가야 한다. 가장 삼가야 할 것은 거짓 증언이다(5절). 재판에서 증인의 증언은 목숨이 달린 재판의 향방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한 요소다. 고대에는 거짓 증언으로 억울하게 돌에 맞아 죽는 경우도 많았다. 희생자는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사탄은 거짓의 원조이기에 거짓 증언은 가장 사탄적인 것이다. 중세에서도 종교 재판에서 거짓 증인이 “저 사람 마녀에요.”라고 하면 보통 사람도 마녀가 되어 화형에 처해졌다. 거짓 증언은 나를 속이고 남도 죽이는 이중적인 최악의 죄다. 거짓 증언을 하고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은 미련한 모습이다(9절). 왜 사람이 남을 속이고 남에게 거짓말로 상처를 입히는가? 그 악한 결과가 자기에게 미쳐 최종적으로 자기의 길과 행복을 막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즘 거짓 피해자나 과장 피해자 때문에 오히려 피해보는 경우도 많다. 어떤 사람이 차가 약간 부딪혀 상대가 비틀거리니까 “저 사람 쇼가 심하네. 어떤 트집을 잡을지 몰라. 큰일 나겠다.”고 여기고 자기도 픽 쓰러졌다고 한다. 그런 쇼잉 후에 ‘진단서, 합의’라는 말이 나온다. 비겁하고 거짓된 삶이다. 그런 쇼맨을 보면 보험사직원은 인간 이하로 보고 그냥 합의해준다. 돈 몇 푼 더 받으려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일은 사람이 할 일도 아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도 멀어지면서 더 많은 것을 잃는다. 정직하게 행동해야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3. 겸손하게 말하는 사람

 교만하고 미련한 자는 입으로 매를 벌지만 지혜롭고 겸손한 자는 입으로 자기를 지킬 줄 안다(3절). 교만한 자에게는 지혜가 머물지 않기에 그의 말은 특별히 귀담아 듣지 말고 아예 교만하고 미련한 자에게서는 떠나는 것이 좋다(6-7절). 좋은 사람을 잘 분별해서 가까이하는 것도 복이다. 공동체나 사람을 힘들게 하는 사람을 ‘트러블메이커(trouble maker)’라고 한다. 더 나아가 미칠 정도로 힘들게 하는 사람은 ‘크레이지메이커(crazy maker)’라고 한다. 사람을 미치게 하는 7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째, 요구가 많은 사람이다. 그는 모든 것을 주도하려는 ‘작은 히틀러’다. 둘째, 비판이 많은 사람이다. 그는 남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 지적하는 ‘인간 족집게’다. 셋째, 주장이 많은 사람이다. 그는 계속 논쟁하고 악을 쓰는 ‘인간 확성기’다. 넷째, 분노가 많은 사람이다. 그는 사소한 일로 쉽게 화를 내서 분위기를 깨는 ‘인간 활화산’이다. 다섯째, 불만이 많은 사림이다. 그는 감사할 줄 모르는 ‘성인 어린이’다. 여섯째, 무례가 많은 사람이다. 그는 ‘행동하는 욕쟁이’다. 살면서 ‘무례하다, 건방지다, 당돌하다, 욕을 잘한다’는 말을 듣지 않도록 하라.

 일곱째, 교만이 많은 사람이다. 그는 ‘작은 루시퍼’다. 교만 죄는 사탄의 속성을 가장 많이 닮은 최악의 죄다. 성도가 가장 듣지 말아야 할 말도 ‘교만하다’는 말이고 남에 대해 가장 조심스럽게 써야 할 말도 ‘교만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남에게 ‘교만하다’는 말을 쉽게 쓰는 사람을 교만하게 보실 때가 많다. 요구, 비판, 주장, 분노, 불만, 무례가 많은 것은 다 교만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늘 겸손한 언행을 가지도록 최선을 다하라.

4. 자기 길을 아는 사람

 슬기롭고 지혜롭다는 것은 ‘자기의 길을 아는 것’이다(8절). 물론 사람이 자기 길을 온전히 알기는 힘들다. 중요한 것은 정직이다. 정직이 길이다. 정직하고 겸손하게 땀을 흘리며 나아가면 길은 열리고 그렇게 사는 사람이 어떤 족집게 예언자보다 더 길을 아는 인생이다. 하나님이 내 길을 아신다고 믿고 내가 가야 할 길을 가면서 환경이나 남의 말에 크게 흔들리지 말라. 남이 걸어오는 논쟁 시험이나 논쟁 게임에도 빠져들지 말라. 논쟁이 습관화된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집사님! 정말 고마웠어요. 저를 설득해주셔서 감사해요.”라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예수님은 반대자들과 논쟁하고 싸우지 않았다. 예수님의 허물을 찾으려는 ‘반대로 동기화된 사람들’과의 논쟁은 시간낭비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시험 게임에 말려들지 않았고 빌라도의 질문에도 침묵하셨다. 사람마다 반대하고 공격하는 이유가 다 있다. 잘못된 편견도 자기 논리가 다 있다. 그렇게 반대로 동기화된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과 논쟁할 필요가 없다. 편견을 가진 사람을 논리로 설득시키려고 하지 말라. 종알종알 말을 많이 잘해서 편견을 가진 사람을 그의 사고에서 탈출시킬 수 없다.

 사도 바울에게도 수많은 논쟁 시험이 다가왔지만 그것에 말려들지 않았다. 고린도후서 4장 2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겠다.”고 했다. 논쟁에 빠져들지 않겠다는 뜻이다. 인정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인정받지 못하면 논쟁을 더 일으킨다. 그런 논쟁에 빠져들지 말고 특히 인터넷 논쟁에는 더 빠져들지 말라. 익명으로 표출된 인터넷 댓글을 통해 익명의 사람과 논쟁하며 논쟁 상황에 빠져드는 것처럼 시간낭비는 없다.

< 늘 정의의 편에 서라 >

 어떤 사람이나 현실이나 환경이 내 삶을 조종하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성도가 ‘문간에 깔아놓은 신발닦개’인 도어매트(doormat)처럼 취급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용서도 도어매트가 되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라. 용서와 신뢰는 다르다. 용서는 즉시 가능해도 신뢰는 시간이 필요하다. 남편이 술주정을 해서 아내가 집에서 쫓아냈다. 한참 후 남편이 돌아와서 “여보! 용서해주시오.”라고 하면 바로 용서할 수 있다. 그 용서를 받고 남편이 “이제 나를 집으로 받아주시오.”라고 해도 그때는 즉시 받아주지 않고 “노.”라고 한다. 아직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용서와 신뢰 사이에는 시간 차이가 존재한다. 그 시간에 참된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목사가 성적인 잘못을 범했다가 진심으로 회개하면 용서해야 하는가? 용서는 바로 할 수 있다. 그러면 용서했기에 다시 교회 담임목사로 모실 수 있는가? 아니다. 일정한 회복 단계와 과정이 필요하다. 용서해주는 것은 바로 되지만 신뢰해주는 것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때로는 단호하게 불의한 상황을 거절해야 참된 의와 복이 펼쳐진다.

 그런 단호함을 보면 어떤 사람은 따진다. “목사님! 믿는 사람은 온유해야 하지 않나요?” 물론 온유해야 한다. 그러나 온유한 것(meek)은 유약한 것(weak)이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온유함의 헬라어 원어는 ‘훈련된 온유’를 뜻한다. 그런 온유함은 사실상 약한 것이 아니라 강한 것이다. 하나님은 성도가 도어매트로 취급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불의한 공격을 운명으로 받아들여 불의가 승리하게 하지 말라. 남이 나를 시험 게임에 빠져들게 해도 내가 빠져들지 않으면 된다. 남이 나를 컨트롤하게 하지 말고 내가 나를 말씀에 따라 컨트롤되게 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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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요한복음 21장 8-9절

8.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실패의 현장에 다시 서라 (요한복음 21장 8-9절)

< 차이가 나쁜 것이 아니다 >

 성격 차이는 나쁜 것이 아니다. 서로 이해하고 참아주면 성격 차이가 오히려 축복의 재료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다르게 창조하셨다. 성격이 똑같으면 오히려 재미없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사람마다 의견과 생각이 다른 것이 당연하고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도 당연하다. 중요한 것은 만남을 소중히 여기고 다른 것을 소중히 생각하고 서로 믿고 이해하고 인내하고 섬겨줌으로 하나가 되려는 자세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많이 달랐다. 제자들이 기적적으로 고기를 잡은 후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발견하고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라고 외치자 베드로는 즉시 겉옷을 두른 후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때 다른 제자들은 어떻게 했는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왔다. 오십 칸은 약 90미터쯤 된다. 즉 예수님이 계신 곳과 제자들이 탄 배 사이의 거리가 약 90미터 정도인데 그 거리를 작은 배를 타고 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왔다는 말이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얼마나 다른가? 예수님께 베드로는 즉각 바다로 뛰어내려 헤엄쳐 왔지만 제자들은 배와 그물을 끌고 왔다. 그 장면에서 즉시 바다로 뛰어내린 베드로의 행동이 주목을 끌지만 그렇다고 다른 제자들은 틀린 것은 아니다.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처럼 다 뛰어내리면 배와 잡은 고기는 어떻게 하는가? 베드로처럼 바다로 뛰어내려 주님께 오는 제자도 필요하고 배와 잡은 고기를 챙기고 주님께 오는 제자도 필요하다. 공동체에는 비전을 세우고 힘차게 앞서 나가는 사람도 필요하고 반면에 뒤를 잘 챙기고 살피며 따라가는 사람도 필요하다.

 자연을 보면 각 사물마다 자기의 색깔이 있기에 오히려 더 아름답게 보이듯이 서로의 차이와 필요를 인정하면 그 공동체는 더욱 복된 공동체가 된다. 자기만 옳지 않다. 남도 그의 입장에서는 옳을 수 있다. 남을 나처럼 만들려고 하지 말라. 자녀도 내 맘대로 못하는데 남을 나처럼 어떻게 만드는가? 오히려 내가 남처럼 한번 되어보는 것이 필요하다. 남을 뜯어 고치기보다 먼저 나를 뜯어 고치라. 나를 감추고 고쳐가며 다양성 중에 일치를 꿈꾸고 서로 감싸 안을 때 그 공동체는 복된 공동체가 된다.

< 실패의 현장에 다시 서라 >

 제자들은 자기 성격과 방식대로 주님께 가까이 왔지만 그 중에 베드로가 가장 먼저 왔다. 그때 베드로는 주님께 반갑게 달려들지 않고 갑자기 주춤했다. 무엇인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곧 이어 나머지 제자들이 육지에 올라 똑같은 장면을 보았다. 그들이 가장 먼저 무엇을 보았는가? 그들이 육지에 올라서 가장 먼저 본 것은 ‘숯불’이었다.

 제자들은 육지에 올라서서 예수님을 똑바로 보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기다리지 못하고 고기 잡으러 나간 자신들의 모습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눈을 약간 내리깔고 있는데 그들 눈에 처음으로 보인 것은 ‘숯불’이었다. 그 숯불을 보고 다른 제자들은 큰 감정이 없었겠지만 베드로는 가슴이 덜컹했다. 얼마 전 숯불 앞에서 주님을 세 번 부인했던 기억(요 18:18)이 아련히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와 모든 상황이 비슷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했던 때도 새벽 시간이었고 본문의 장면이 펼쳐진 때도 새벽 시간이었다.

 그때 숯불을 보면서 베드로는 얼마 전의 수치스런 기억이 떠올랐고 귀에서는 마치 닭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생각하기도 싫은 그 장면과 너무 흡사했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리 베드로가 담대하고 적극적인 사람이라도 양심과 죄책감도 있는데 어떻게 반갑게 먼저 “주님! 그 동안 잘 계셨어요?”하고 말을 걸겠는가? 그는 그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떨어뜨리고 있었다. 마음속에 야단맞을 각오를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주님께서 직접 말씀은 하지 않고 이렇게 숯불을 피워 나를 책망하시는구나!”

 가끔 청중들은 설교에 대해 오해한다. “저 말 나 들으라고 하는구나.” 물론 누구 들으라고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죽이려고 그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살리려고 한 것이다. 베드로도 비슷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저 장면 나 보라고 만드셨구나!” 물론 그런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이 구절에 나오는 숯불이란 말은 헬라어로 ‘안드라키아’라고 한다. 이 단어는 복음서에 딱 두 번 나온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할 때와 본문에서다.

 또한 아침 식사 후에 주님은 숯불 앞에서 베드로가 3번 주님을 부인했던 것처럼 베드로에게 3번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모든 상황이 비슷하기에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비슷한 장면을 만드셨을 수 있지만 베드로의 영혼과 자존심을 죽이려고 그 장면을 만들기보다 오히려 베드로의 영혼과 자존심을 살리려고 그 장면을 만드셨다. 과거의 실패 현장에 다시 서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고 그 실패의 현장에 정직하게 설 때 새로운 도약이 가능함을 아셨기 때문이다. 실패 앞에서 정직하라. 실패와 연약함을 인정할 때 은혜의 길이 열린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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