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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싶은 말들

[온라인새벽기도] 공평하신 하나님

by manga0713 2019. 2. 18.

 

 

 

 

본문말씀 : 에스겔 18장 25절

25.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지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냐

공평하신 하나님 (에스겔 18장 25절)

 < 공평하신 하나님 >

 작년에 한국 총회가 생기면서 나도 교회 문제에 공정한 판결로 직접 관여해야 할 상황이 생겼다. 교회 분쟁은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요새 계속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 어떤 결정을 내려도 한 편은 승복이 힘들고 상처가 될 텐데 잘 처리할 지혜를 주소서.” 이번에 판사의 고충이 좀 더 이해되었다. 판사는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한다. 그런데 양심은 주관적인 것이기에 시대정신을 고려하지만 시대정신도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에 누구나 승복할 판결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또한 변호사의 능력에 따라 판결이 달라지는 것도 공의에 의문을 품게 한다.

 판사도 사람이기에 잘못된 판결을 내릴 수 있고 바른 판결을 내려도 소송에서 진 편은 억울한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런 억울함을 줄이려고 생긴 제도가 배심제다. 배심제는 무작위로 뽑힌 보통 시민의 참여로 운영되는 재판이기에 밀실에서 판사와 검사와 변호사가 짜고 치는 게임이란 인식과 불신을 줄여 재판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시대정신과 보편가치와 상식에 조금 더 근접한 판결을 추구하지만 감정적인 대중주의로 흐르기 쉽다. 특히 전문지식이 필요한 재판에서 배심원은 변호사의 화려한 언변에 휘말리기 쉽다.

 예를 들어 성범죄 재판에서 남자 쪽에서 여자를 꽃뱀으로 몰아 가해자를 무죄로 만드는 데 휘말리거나 반대로 여성단체의 압력과 여자의 눈물연기에 넘어가 인민재판처럼 무죄인 남자를 유죄로 만드는 데 휘말릴 수 있다. 때로는 명백한 범죄도 피고가 불우하게 자랐다거나 정신병이 있다는 이유로 무죄로 선고할 수도 있다. 살인해도 돈을 엄청나게 쓰면 변호사가 각종 사연을 다 발굴해 무죄를 받아낼 가능성이 큰 것이 배심제의 약점이다.

 또한 소리가 높은 압력단체에 굴복해 잘못된 판결을 내릴 가능성도 커진다. 압력단체의 정의는 선택적 정의인 경우도 많고 그 소리도 그 단체의 존재 부각과 관련된 사람이나 외침을 선별해 대변하는 소리인 경우가 많다. 소외자의 상처를 이용해 이익과 영향력 증대를 추구하는 압력단체의 확증 편향성이 심해지면 진상규명, 팩트체크,, 해명기회도 외면한 채 막무가내 식의 주장을 펴는 압력단체에 휘둘리기 쉬운 것도 배심제의 약점이다.

 물론 공의롭지 못한 편향적인 판결을 확증 편향성 판사도 내릴 수 있다. 배심원의 감정적인 대중주의도 위험하지만 판사의 편향적인 양심주의도 위험하기에 점차 정보통신이 발달하고 시민의 보편지식이 많아지면서 오판 위험성이 낮다고 여겨지는 배심제를 채택하는 나라가 많아지고 있다. 결국 배심제는 최선이 아닌 차선의 판결제도이고 판사 개인의 확증 편향성을 막는 측면에서는 차악의 판결제도인 셈이다.

 양측의 주장과 이해관계가 크게 다르면 다 만족한 판결을 내리기는 더 힘들다. 법과 양심을 따라 판단한다는 말도 판사 양심대로 얼마든지 판결이 달라진다는 뜻이기에 판결에 승복하기 어려운 때가 많다. 그래도 사회의 근간 시스템이 유지되려면 승복해야 한다. 문제는 외적인 요인에 좌우되는 불의한 판결로 인한 상처가 사회적으로 계속 누적되어 하늘에 사무칠 정도가 되다가 임계점을 넘으면 사회적인 대변혁이 반드시 생긴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를 주름잡는 한 로펌이 있다. 언뜻 보면 그 로펌 권력이 점차 무한대로 커져 대통령 권력도 넘을 것 같다. 그러나 인간 역사는 특정 세력이 계속 커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나님도 용인하지 않는다. 그래서 의뢰인의 힘과 로펌의 실력에 의해 의와 불의가 뒤바뀌는 상황이 주는 사회적 상처가 계속 누적되면 언젠가는 사회적인 대변혁이 일어나 있는 사람이 순식간에 다 잃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부조리한 사회상 때문에 누적된 상처가 부분적으로 치유되는 정신적인 희년 상태가 정권 교체 상황이다. 그러나 세상에 완벽한 정권은 없기에 실정하거나 오래 정권을 잡으면 시민의 상처와 불만이 누적되어 점차 변혁의 임계점을 향하게 되어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권력을 잡은 정권이 불의와 부조리로 인한 시민의 상처를 얼마나 더 해소시켜주느냐 하는 것이다.

 부조리한 사회상으로 인한 상처도 크지만 억울한 판결로 인한 상처는 훨씬 크기에 판사는 최대한 정당하게 판결해야 한다. 때로는 부당한 판결과 조치로 너무나 억울한 마음이 생길 수 있다. 그 마음을 어떻게 위로받는가? 하나님의 공평하고 공의로운 심판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그런 믿음으로 한과 상처를 극복하고 새롭게 일어서서 공평한 세상을 꿈꾸며 나아갈 때 꼭 필요한 인식이 공평과 평등의 차이에 대한 인식이다.

 성경에 ‘평등’이란 단어는 한 번도 나오지 않지만 ‘공평’이란 단어는 무수히 나온다. 하나님은 획일적인 평등보다 의로운 공평을 원하신다. 하나님은 기도 많이 한 사람과 적게 한 사람을 똑같이 축복하는 평등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기도 많이 하고 영과 진실로 예배하고 교회를 위해 헌신한 사람을 심은 대로 축복하는 공평하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똑같은 행복의 기회와 가능성을 주지만 행복의 열매는 심은 대로 주신다. 남에게 준 것을 내게 주지 않은 것만 생각하지 말고 남에게 주지 않은 것을 내게 준 것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공평을 확신하라.

< 공평과 관련해 필요한 태도 >

 하나님은 내게는 ‘이것’을 주고 남에게는 ‘저것’을 주시는 식으로 다양하게 주셨기에 세상은 더 아름다워진다. 평등과 공평을 오해하지 말고 하나님이 평등하신 하나님이 아닌 공평하신 하나님인 것을 더 감사하라. 성도는 공평과 관련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1. 자기 길을 살피라

 본문 25절과 29절은 반복해서 말한다.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지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냐.” 공평하지 않는 길로 가는 사람이 하나님을 공평하지 않게 여길 때가 많다. 게임에서 자기 반칙을 봐주지 않는다고 심판을 불공평하다고 하는 사람처럼 하나님이 불공평하게 어떤 것을 해주거나 자기편만 무조건 들어주길 원하지 말라.

 가끔 이런 식의 간증을 듣는다. “어느 날 지방에 갔다가 예배에 늦어 시속 160km로 달려왔는데 하나님이 사고도 막아주고 교통경찰의 손에서 지켜주셨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은 주책없게 “할렐루야!” 하고 습관적으로 외친다. 하나님은 그런 “할렐루야.”를 받지 않는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지만 내 불의를 무조건 두둔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공정하게 게임을 운영하고 법 집행은 똑같이 하시면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

 게임은 공정히 이끌지만 게임 후에는 자녀에게 “수고했다.”고 하시고 영원한 집으로 인도하신다. 문제는 하나님이 불공평한 것이 아니라 내가 불공평한 길을 가는 것이다. 내가 공평하지 않은 길을 가면서 하나님의 공평을 의심하거나 불평하지 말라. 대개 말의 질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 적절하지 않은 말은 다섯 마디도 많고 불평하는 말은 한 마디도 많다. 불공평하다는 불평이 많은 것은 내가 지금 공평한 길로 가지 않는다는 반증이다. 내가 불평이 많다는 느낌이 들면 가장 먼저 자기 길부터 살피라.

2. 현실만 보지 말라

 어려운 현실만 보고 삶을 불공평하게 여기지 말라. 눈에 보이는 현실이 최종 결과는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이 더 큰 것이다. 현실의 작은 전쟁에서는 실패해도 인생 전체의 큰 전쟁에서는 승리하라. 눈앞에 펼쳐진 실패는 영원한 성공을 위해 잠시 등장한 엑스트라다. 거짓말도 못하고 순해빠져서 잘 당하고 편법 대신 정도만 걷다가 어렵게 사는 성도를 보면 마음이 아프지만 하나님은 ‘순해 빠진 삶’이 ‘손해 보는 삶’이 아님을 반드시 증명해주실 것이다.

 눈에 보이는 기적을 추구하면서 “왜 남은 표적이 많은데 나는 표적이 없을까?” 하고 불평하지 말라. 표적을 좋아하면 영혼이 타락한다. 표적을 잘 일으키는 목사를 시기해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친히 말씀한 것이다. 마태복음 12장 39절에서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말씀했다. 기적을 찾아 헤매는 모습을 예수님은 그 마음이 신랑이신 예수님보다 다른 것으로 향해 있는 영적인 음란으로 보신다.

 어떤 때는 기적적인 체험을 통해 문제 하나 해결하고 귀신 하나 내쫓은 후 일곱 귀신이 들어와 교만해지고 남의 영성을 낮게 여기고 교회를 우습게 여기는 사람도 있다. 불행한 사람이다. 체험이 있어서 마음이 높아지기보다 차라리 체험이 없이 겸손한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 낫다. 표적을 너무 추구하지 말고 공평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더욱 씨를 뿌리는 일에 힘쓰라. 표적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말씀대로 살 때 하나님이 진짜 표적을 주신다.

3. 비교의식을 버리라

 비교의식은 나를 왜소하게 만들거나 교만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나만의 특징과 장점과 행복의 조건을 주셨다. 하나님이 어떻게 공평한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지만 하나님이 공평하신 분이란 사실만은 굳게 믿으라. 부모는 아이들에게 같은 선물을 사줄 때도 있지만 더 큰 기쁨을 주려고 나이와 성향에 맞게 다른 선물을 사줄 때가 많다. 그때 자기가 받은 선물이 맘에 안 든다고 불평하면 부모는 자기의 공평한 마음을 몰라주는 자녀의 철없는 모습에 마음이 아프다. 하나님도 내가 불평하는 모습을 보면 그처럼 마음 아파하실 것이다.

 어려운 가정에서 불편한 몸으로 태어나거나 가난한 나라에 태어난 것은 하나님의 좋은 선물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가난한 나라 사람의 행복 지수가 더 높다는 통계도 많다. 작은 것에도 행복을 찾는 마음도 또 다른 측면에서의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또한 현재는 내가 부족하게 보여도 천국에서는 더 칭찬 받는 존재가 될 수 있다. 평생 약한 몸으로 살면서도 행복하게 살다가 천국에 오면 하나님은 “수고했다!”고 크게 위로해주실 것이다.

 없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없으면 어때! 내게 이것이 있잖아!” 하는 배짱을 가지라. 내게는 나를 사랑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있다. 어떤 신실한 성도는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나처럼 큰 죄인을 끝까지 품어주고 사랑해주시니 나를 특별히 사랑하는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은 하나님 같다.”고 대답했다. 마음의 부자다. 내게 없는 것으로 비교해 불평하지 말고 내게 있는 것으로 감사하는 마음의 부자가 되라.

4. 공평을 힘써 이루라

 세상이 불공평한 것 같으면 내게 없는 것을 가진 사람을 보고 낙심하지 말고 내가 가진 것이 없는 사람에게 내 것을 나눔으로 공평을 이뤄가라. 사회가 불공평하다고 탄식만 하지 말고 내 것을 나누면서 공평한 사회를 꿈꾸며 나아가라. 탄식하면 그만큼 늙지만 꿈꾸면 그만큼 젊어진다. 지금 나보다 힘든 사람이 많다. 평생 장애로 사는 사람도 있다. 진정 공평을 원하면 나보다 잘난 사람을 생각하며 “왜 공평하지 않을까?”라고 하지 말고 나보다 힘든 사람을 생각하고 그를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라.

 가끔 <월새기> 문서선교를 위해 모르는 사람이 헌금하거나 무명으로 헌금하면 더 감동이 된다. 좋은 일을 통해 누군가를 감동시키면 하나님도 감동하신다. 늘 분수에 맞게 살되 선교와 구제를 위해서는 분수에 넘치게 살라. 어떤 성도는 선교와 구제를 위한 재정을 조금 줄이고 교회의 부족한 부분부터 먼저 채웠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생각한다. “우리도 쓰기에 부족한데 저렇게 선교하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

 어떤 성도는 자체 교회 건물의 꿈을 가지고 있다. 그런 꿈이 늦어져도 선교와 구제를 미루지 말라. 그런 식으로 미루면 선교와 구제는 늘 후순위가 된다. 하나님은 교회가 “건축을 잘 하느냐?”보다 “선교를 잘 하느냐?”에 더 관심이 많다. 내 형편만큼 남의 형편도 살피려고 할 때 하나님은 내 꿈도 귀하게 보신다. 내게 없는 것을 불평하지 말고 내게 있는 것으로 힘써 나누는 삶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고 사는 성도의 마땅한 도리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