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룩함을 오해하지 말라 >
유명한 김밥 프랜차이즈가 있다. 그곳이 이단 단체가 운영하는 곳이란 루머를 앞세워 예전에 일부 영성주의자들이 불매운동을 벌였다. 진위 여부를 떠나 거기서 식사하지 않는 것을 거룩함이라고 여기는 것은 기독교의 진리를 극단화시킨다. 더 나아가 거기서 식사하는 남을 거룩하지 못하다고 정죄하면 더욱 극단적인 모습이 된다.
한 사람이 하는 일, 관련된 일, 언어, 성격, 취미 등을 조합하면 수만 개도 넘는 삶의 형태가 나온다. 지구의 인류가 수십 억 명이기에 전 지구인에게 나타날 수 있는 삶의 형태는 수십 조 개도 넘는다. 그 중에 몇 개의 삶의 형태를 거룩함의 기준으로 삼아 영적인 우월감을 가지면 안 된다. 믿음 안에 있는 삶의 전반적인 모습을 보고 거룩한 존재라고 인식하는 것이지 어떤 한두 가지 삶을 실천하기에 거룩한 존재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A 집사가 한 영화를 좋아했다. 어느 날 그는 그 영화 주인공이 이단 교회 신자란 말을 들었다. 그때부터 그 연예인이 나오는 영화는 안 보고 옛날에 봤던 영화의 좋은 기억도 다 지우려고 했다. 죄의 흔적을 벗겨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애쓰는 삶이 거룩한 삶인가? 하나님은 그런 모습을 보고 가상하게 여기기보다 안타깝게 여기면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아무개야! 네가 벗겨내야 할 죄의 흔적이 그것뿐이겠니?”
더 나아가 A 집사는 남들에게 그 연예인의 영화를 보지 말라고 했다. 사람들이 물었다. “그에게 원한이 있어요?” 그가 대답했다. “그는 이단 신자예요.” 그러면 분별력 있는 사람은 그를 거룩하게 보기보다 거룩하게 보이려고 애쓰는 사람으로 본다. 거룩함을 기준으로 3종류의 사람이 있다. 거룩한 사람, 거룩하지 않은 사람, 거룩하게 보이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둘째 사람과 셋째 사람 중 누가 더 정신이 병들기 쉬운가? 스스로 판단하라.
문제는 A 집사가 그 연예인의 영화는 보지 않아도 거의 매일 한 커피 가맹점에 들린다는 점이다. 그 커피 가맹점은 한국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다 가봤을 것이다. 그곳은 몇 가지 반기독교 사상을 전하는 곳으로 소문났다. 어떤 연예인이 이단 신자라고 그의 영화까지 안 보면서 자신은 정작 그런 곳을 매일 출입하며 거기에 돈을 벌어주고 있었다. 그런 자기모순적인 모습이 무수히 노출되는 삶이 과연 거룩한 삶인가?
어떤 작곡가나 연주가는 잔잔하고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음악 풍을 가졌다. 그러자 한 영성 단체가 그를 뉴에이지 음악가라고 규정하고 그 음악을 안 들어야 거룩한 삶인 것처럼 주장한다. 심지어 어떤 영성주의자는 누군가의 자의적 해석을 무조건 추종해서 일부 캐럴이나 복음 송도 이단 색채가 있다면서 그 노래를 부르면 영성이 없다는 듯이 주장한다. 그런 영성주의자는 대개 이원론적인 영성주의자다. 결국 깊이 들어가 보면 자신이 더 이단성을 가지고 기독교의 참된 진리를 왜곡하면서 남의 영성을 탓하는 셈이다.
일전에 어떤 일로 한 불교 상점에 갔었다. 그때 거기서 흘러나온 멜로디가 너무 낯익었다. 자세히 들어보니까 찬송가 39장 <주 은혜를 받으러 모인 성도들>이었다. 지금은 중국도 많이 개방되어 무서운 공산국가란 이미지가 줄었지만 17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때 중국 북경의 유명한 한 공원에 갔는데 거기서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흘러나와 신기하게 여겼었다. 세상도 변하고 있다. 수용해야 할 것과 수호해야 할 것의 대상을 사소한 것에 맞추면 헛된 영성 자랑으로 인해 참된 영성을 잃기 쉽다.
영성주의자가 김밥 프랜차이즈까지 이단 소문을 퍼뜨린 이유는 그 로고가 한 이단 로고와 유사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렇게 동네 김밥 집은 멀리하면서 왜 기독교 이단 분파인 경교의 영향을 받은 모슬렘 국가에서 수입한 석유 제품은 왜 쓰는가? 왜 아랍에미레이트 항공이나 카타르 항공 비행기를 타는가? 어떤 가게를 안 가고 어떤 음악을 안 듣는 것이 거룩함인 줄 알면 이원론적인 영성주의자의 기독교 훼손 전략에 말려들기 쉽다.
거룩한 태도와 거만한 태도는 가장 반대되는 것이다. 거룩함을 자랑하는 것은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원론적인 영성주의자처럼 거룩함을 규정해 세속적인 환경을 멀리하려면 사막이나 동굴에서 혼자 살든지 지구를 떠나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막이나 동굴에서 혼자 사는 것을 거룩하다고 하지 않는다. 거룩함을 힘써 추구하되 자기가 규정하는 어떤 특정적인 삶의 스타일을 거룩함의 기준으로 내세우지 말라. 예수님은 세상 속에서 빛을 발하라고 하셨다. 거짓 영성에 미혹되지 말고 세상 속에 들어가 참된 영성과 거룩함을 모범적으로 보여주라.
< 거룩함에 이르는 길 >
본문에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해쳐 아론의 두 아들이 갑자기 죽는 장면이 나온다. 거룩한 존재가 되려면 절제해야 할 것들이 많다. 본문은 무엇을 절제해야 한다고 교훈하는가?
1. 편법을 절제하라
대제사장 아론에게는 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의 네 아들이 있었다. 그 중에 장자와 차자인 나답과 아비후가 향로에 다른 불을 담아 분향했다가 여호와의 불에 삼켜져 죽었다(1-2절). 향로에 담아야 할 ‘다른 불’이 아닌 ‘바른 불’은 번제단의 불인데 나답과 아비후는 번제단의 불이 아닌 다른 불을 사용해 그들 편의대로 분향단의 향을 살라서 급사했다. 이 사건은 편법으로 제사를 경솔히 드리지 말라는 메시지를 준다. 편법은 언젠가 반드시 문제를 낳는다.
한 초대형 교회 목회자는 종종 권력 친화적인 설교를 해서 예전부터 염려하는 사람이 있었다. “언젠가 권력 변화가 생기면 어려워질 수 있는데.” 목회자는 교회에서 정치 성향을 나타내면 안 된다. 교인 구성원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목회자는 말씀이 합리적인 편이었기에 존중하며 따르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최근에 편법 세습 문제로 이제까지 쌓아놓은 이미지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내려놓지 못해서 생긴 추락이다.
길이 막힌 상황에서 최대한 지혜롭게 길을 열려고 방법을 찾는 것은 필요하지만 불의나 불법 인상을 주는 편법은 삼가야 한다. 왜 잘못된 편법을 쓰는가? 대개 욕심 때문이다. 이 세상에 욕심이 없는 사람은 없고 욕심을 다 버릴 수도 없다. 때로는 좋은 욕심도 있다. 다만 버려야 할 욕심은 지혜롭게 잘 버리라. 남들이 지켜보고 있다. 특히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신다. 잘 버리지 않으면 더 잃고 잘 버리면 더 얻는다.
2. 말을 절제하라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나답과 아비후의 급사가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을 나타내는 조치였다고 말씀했다(3절). 시험에 들기 좋은 말씀이다. 그때 어떤 사람이 아론의 심정을 대변한다고 하며 모세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두 아들을 잃고 극심한 슬픔에 빠진 아론에게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해 천벌을 받았다는 식으로 꼭 말해야 합니까? 아무리 바른 말도 3살 많은 형님 앞에서 상처에 식초를 붓는 식으로 꼭 말해야 합니까?”
의로운 생각에서 나온 매우 의로운 말 같다. 또한 아론의 속마음을 대변해주는 말 같으니까 아론이 속으로 통쾌하게 여기겠는가? 그러나 성경은 아론의 반응에 대해 “잠잠하니”라고 딱 한 마디로 표현했다. 아론은 크게 시험에 들 수 있는 기막힌 상황에 처하고 기막힌 말을 들었어도 그저 잠잠히 있었다. 말도 절제하고 생각과 반응과 감정과 행동도 절제하면서 그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원망 없이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때 잠잠했기에 아론은 금송아지 우상숭배의 전력도 있고 두 아들 급사 사건으로 신뢰도가 떨어졌어도 모세는 아론의 잠잠한 태도를 보고 자기 아들이 아닌 아론의 셋째 아들인 엘르아살을 통해 대제사장 가문을 유지시켰고 결국 그의 가문은 신약시대까지 약 1500년간 대제사장 가문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아론의 잠잠함이 엄청난 가문의 복을 예비한 셈이다. 한스러운 일을 당해도 믿음 안에서 말을 절제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축복으로 갚아주신다.
3. 슬픔을 절제하라
왜 하나님은 아론 부자들의 애곡을 금지시켰나(6절). 극한 슬픔까지 극복하는 믿음의 본을 보이라는 뜻이다. 특히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의 징계로 죽었기에 그때 슬픔을 표시하면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될 수 있기에 더 자제해야 했다. 다만 슬픔을 표현할 때는 두 사람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지 말고 여호와께서 치신 불의 심판 때문에 슬퍼하라고 했다. 개인적인 슬픈 감정으로 인해 공동체가 흔들리거나 믿음과 진리가 흔들리지 않게 하려는 조치였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길에 달렸다. 자기 인생을 자신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 불의의 사고가 없으면 좋지만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기에 어떤 목회자는 가끔 자녀들에게 말한다. “얘들아, 내가 먼저 하늘나라에 가도 너무 그 일로 인해 슬픔에 빠지지 말고 조금 슬퍼한 후에는 엄마와 함께 꿋꿋하게 잘 살아라.” 그렇게 사후처리를 잘하기가 쉽지는 않기에 미리 유언처럼 사전 교육을 해놓으면 슬픔의 극복에 큰 도움이 된다.
얼마 전에 둘째 딸이 말했다. “아빠! 혹시 제가 어떤 일로 먼저 천국에 가면 사흘만 슬퍼하세요.” 너무 대견해서 저도 대답했다. “내가 천국에 가면 너도 사흘만 슬퍼해라.” 신학적으로는 맞지 않는 표현이지만 비유적인 표현으로 천국에 먼저 가면 이 땅에 남은 가족을 최대한 지켜주기로 서로 약속했다. 그런 약속을 주고받은 기억만으로도 천국 소망이 넘치고 힘이 나서 각종 슬픔을 극복하고 남은 사람은 열심히 살 것이다. 성도는 슬픔을 잘 절제하고 과거를 잊고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새롭게 일어서서 사명을 따라 살아야 한다.
4. 독주를 절제하라
왜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사용하려고 했는가? 성소 밖 번제단의 불로 성소 안 분향단의 향을 사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쉬운 계명을 왜 어겼는가? 편의주의나 불순종 때문으로만 생각하기에는 너무 이해가 안 된다. 아마 나답과 아비후가 독주에 취해 그렇게 행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사건 후에 곧 제사장의 독주 금지 규례가 주어지기 때문이다(8-9절). 독주 금지 규례를 정한 것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해 백성을 잘 가르치기 위해서였다(10-11절).
마지막 때는 미혹의 시대이기에 바른 분별력을 힘써 길러야 한다. 특히 영적인 리더는 양떼의 죄를 등에 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의 뜻을 가슴에 안고 양떼에게 나아가야 하기에 분별력이 더 필요하다. 거룩한 것과 거룩하게 보이려고 애쓰는 것을 잘 분별하라. 말씀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고 외면적인 몇 가지 삶만 내세워 나는 거룩하고 남은 거룩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거룩함에 이르는 길이 아니다.
거룩한 삶의 핵심 실천 요소는 무수히 많다. 어떤 음악을 듣고 안 듣고, 어떤 상점을 가고 안 가고, 어떤 연예인을 좋아하고 안 좋아하고, 주일에 식당에 가고 안 가고 등의 내적인 빈곤을 드러내는 얄팍한 모습으로 거룩함을 판별하거나 나타내지 말라. 내면이 텅 빈 존재는 자꾸만 외적인 몇 개의 자기중심적인 거룩함의 기준으로 남을 깎아내리는 이상 성향을 보인다. 그런 성향에 같이 휩쓸려 참된 거룩함에 대한 분별력을 잃으면 결국은 이단적인 영성주의자에게 영혼이 사로잡히기 쉽다.
외적인 거룩함의 기준보다 오히려 남을 배려하고 안 하고, 약자를 경시하고 안 하고, 맡은 일에 책임적이고 그렇지 않고, 약속한 시간을 지키고 안 지키고, 특히 절제하고 안 하고 등으로 거룩함을 판별하거나 나타내라. 절제할 것이 많지만 본문의 교훈대로 편법, 말, 슬픔, 만남, 독주 등을 잘 절제해서 영혼과 정신을 풍요롭게 만들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힘쓰는 참된 거룩함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복된 심령이 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