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고 싶은 말들
[온라인새벽기도] 공의로운 삶을 위한 3대 규례
by manga0713
2018. 1. 18.
[이미지출처: Woogi's review of life "하나님의 단순성"]
본문말씀 : 신명기 25장 1-4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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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2.악인에게 태형이 합당하면 재판장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 앞에서 그의 죄에 따라 수를 맞추어 때리게 하라 3.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 4.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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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로운 삶을 위한 3대 규례 (신명기 25장 1-4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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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의를 따라 재판하라
재판할 때 의와 불의가 뒤바뀐 판결이 생기지 않도록 재판장은 의인은 의롭다고 하고 악인은 정죄하라고 했다(1절). 사람은 외모로 판단할 때가 많다. 첫인상과 외모가 좋으면 소개받을 때나 취직할 때 유익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신다. 외모가 부족하고 장애가 있어도 의와 선이 있다면 하나님 보시기에는 최고의 미남미녀다. 외모가 좋으면 심지어는 법정에서 재판 받을 때도 덕을 본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모나 재물 등으로 재판의 공의가 실종되지 않게 하라고 했다.
민심이 이반되는 가장 큰 이유는 ‘공의의 상실’이다. 공의의 상실을 가장 뼈저리게 체감하게 하는 것은 ‘재판에서의 공의의 상실’이다. 힘은 공의를 조작할 수 있고 특히 권력은 마음만 먹으면 조작과 음해를 쉽게 시도할 수 있다. 그런 조작과 음해에서 자신을 공의로 잘 지키는 것도 중요하고 언론인과 종교인이 공의를 지키는 역할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적인 공의의 최후 보루인 재판관이 공의를 잘 지키도록 하는 것이다.
공의를 따라 살지 못하는 것이 전적으로 개인 책임만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힘에 의해 조작된 여론에 의해 바른 판단을 못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법 지식을 많이 가진 재판관조차 바른 판단을 못할 때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외적인 요인에 좌우되지 않고 최대한 정의로운 판단을 내릴 줄 알고 내리려는 마음을 가진 재판관의 존재는 하나님께서 그 사회에 주신 실제적인 큰 축복 중의 하나다. 그런 사회적인 축복 기반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나님은 공의를 따라 바르게 재판하라는 규례를 주셨다.
2. 기본 인권을 존중하라
태형을 집행할 때는 40대 이상 때리지 못하게 했다(2-3절). 후대 유대인들은 태형을 집행할 때 40대에서 한 대를 뺀 39대까지만 때렸다. 착오로 40대 이상 때리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태형을 집행할 때 3가닥으로 된 채찍을 사용했기에 14번을 때리면 40대를 초과해 42대를 때린 셈이 되기에 13번을 때려 총 39대까지만 때렸다. 그 태형을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5번 당했다(고후 11:24).
40대 이상 때리지 못하게 한 것은 사람을 무자비하게 때려 불구로 만들거나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40대 이상 형벌을 가할 정도로 중죄를 범하면 처형시켜야 했다. 40대 이상을 때리면 형제를 경시하는 것이 된다는 규례는 너무 심하게 매질해 흉측한 불구가 되지 말게 하란 뜻이다. 이 규례는 죄에 대한 합당한 형벌을 내려 정의를 세우려고 하더라도 타인의 인격을 송두리째 짓밟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 규례다. 범죄자도 기본 인권은 보호하라는 것이 성경적 가르침이다.
아인슈타인은 나치가 등장했을 때 많은 지성인들과 언론인들이 나치에 저항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일부라도 교회가 나치에 저항하면서 인권과 자유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보고 자신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않아도 기독교회를 존경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워 나아가는 교회는 인권 존중을 선도해야 한다. 그러면 사회는 조금이라도 새로워지고 역사는 더디더라도 전진할 것이다. 성도에게 사람을 존중하는 삶은 추구해야 할 삶의 목표 이전에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
3. 일꾼을 먹고살게 해주라
곡식을 타작할 때 인정 없는 주인은 소가 곡식 단을 먹지 못하도록 입에 망을 씌웠는데 그렇게 인정 없게 굴지 말고 소도 일하면서 곡식 단을 먹도록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했다(4절). 짐승이라도 그 수고한 대가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이다. 일꾼이 삯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암시다. 예수님이 전도자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마 10:10)고 한 것이나 사도 바울이 교회 사역자들이 교회로부터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전 9:9-14; 딤전 5:18)고 한 것도 본문의 원리에 근거했다.
왜 이런 말씀이 있게 되었는가? 당시에 몇몇 교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은혜로 하는 것이지 무슨 사례가 필요한가? 사역자는 배가 고파야 더 기도하게 되고 더 영성이 깊어져!”라고 하면서 풀타임(full time)으로 일하는 사역자의 필요에 무관심했다. 그런 태도는 리더를 존경하는 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목회자를 존경하면 목회자의 필요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리더에게 정당한 대가를 기쁘게 드리는 것은 리더는 진심으로 존경하는 표시 중의 하나다.
기본적으로 일한 만큼 먹고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라. 일만 시키지 말라. 일도 시키고 누리게 해주면서 일꾼을 정당하게 대우해주라. 최소한 일하면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해주라. 더 나아가 기업가는 일꾼에게 정당한 것 이상의 대우를 해줌으로 행복을 선사하는 꿈과 비전을 가지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말씀 구절이나 명령을 율법적으로 꼼꼼하게 잘 지키는 것을 의미하기보다 누군가에게 대우 이상의 대접을 해주는 삶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임을 그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