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억하고 싶은 말들

[온라인새벽기도] 성령이 임할 때 생기는 역사

by manga0713 2018. 1. 30.

[이미지출처: WIKIPEDIA "Jacob's Ladder"]

 

 

 

 

본문말씀 : 이사야 44장 5절

5.한 사람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또 한 사람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기를 부를 것이며 또 다른 사람은 자기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그의 손으로 기록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라

성령이 임할 때 생기는 역사 (이사야 44장 5절)

1. 회심의 역사

 성령이 임하면 죄를 버리고 주님에게 돌아오는 회심의 역사가 있다. 성령님은 ‘죄를 버리는 회심’도 주도하지만 형식적인 교인이 헌신적인 교인이 되는 ‘차원 높은 신앙적 회심’도 주도한다. 차원 높은 신앙적 회심이란 간단히 말하면 ‘십자가를 지는 삶의 회복’을 뜻한다. 십자가는 목에 거는 것이 아니라 등에 지는 것이다. 조화에 향기가 없듯이 십자가가 없는 삶에는 예수님의 향내가 나지 않는다. 십자가를 지려는 회심의 역사가 있을 때 인물의 길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어느 날, 웨슬레는 런던 올더스게이트에서 누군가 읽은 로마서 서문 말씀을 통해 자신이 진실한 믿음을 가지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때까지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학을 배웠고, 성경과 희랍어를 알고, 교회에 열심히 나가니까 구원받았을 거야.” 그때까지 자신의 구원의 근거는 바로 자신이었다. 그러나 올더스게이트에서 예수님이 없으면 구원받을 수 없음을 홀연히 깨닫고 엎드러졌다. 그때부터 믿음의 진리를 새롭게 깨닫고 제2의 신앙인생을 살았다. 성령이 임하면 그런 회심의 역사가 나타난다.

2. 고백의 역사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는 역사가 있다. 이 역사는 회심한 사람들이 교회의 일원이 되고 자신이 교인임을 말과 행동으로 공개적으로 증거하는 역사를 말한다. 성도에게는 ‘불신자를 전도하는 삶’과 더불어 ‘동료 신자와 교제하는 삶’도 필요하다. 무교회주의자는 아무리 신앙이 대단해도 그 영혼은 얼마 후에 죽는다. 성도의 교제도 중요하지만 더 나아가 불신자에게 증거하는 삶도 반드시 필요하다. 증거가 없는 신앙도 곧 죽는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이웃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도 진실해야 하지만 사람 앞에서도 진실하기를 힘써야 한다. 자신에게도 진실하기를 힘써야 한다. 자기를 속이지 말라. 남이 나를 속이는 것도 문제지만 내가 나를 속이는 것도 문제다.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내로남불’의 삶을 멀리하라. 내가 끼어들면 정당한 차선변경이고 남이 끼어들면 부당한 끼어들기라고 여기지 말라. 진실을 멀리하는 핑계하는 인생으로 살지 말고 진실을 가까이하는 고백하는 인생으로 살라.

3. 결단의 역사
 
 본문 5절에서 ‘손으로 기록하는 것’은 ‘계약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친밀한 언약관계를 상징한다. 성도는 영적으로 이미 서약서를 썼지만 실제로 이렇게 서약서를 써 보라. “나는 하나님을 일생 버리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것입니다.” 그렇게 서약서를 쓰고 자기 마음을 도장 삼아서 그 서약서에 도장을 찍고 신실하게 그 언약을 지키라. 삶을 되돌아보면 우리가 잘못할 때도 여전히 하나님은 신실하게 함께 하셨다. 그처럼 하나님께 신실하라.

 신실하게 산다는 것이 쉽지 않기에 매일 새로운 결단이 필요하다. 누가 그런 결단을 돕는가? 성령님이다. 요새 교회의 이미지가 많이 실추된 상태다. 교회가 세상의 길라잡이가 되지 못하고 세상의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이런 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신실한 삶을 향한 새로운 결단이다. 십자가를 각오한 비장한 결단이 필요하다. 소리만 커서는 안 된다. 흉내만 내도 안 된다. 예언자적인 결단을 하려면 심장이 찔릴 수도 있음을 각오하고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될 수도 있음을 각오해야 한다.

4. 비전의 역사
 
 본문 5절 마지막 부분에 표현된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 것은 ‘두 번째 삶’ 혹은 ‘두 번째 축복’을 상징한다. 성령님은 성도를 보다 깊고 높은 영적 축복과 만족으로 이끄신다. 그때도 강제로 몰아붙이지 않고 성도에게 거룩한 비전과 열망을 주심으로 그 축복으로 이끄신다. 성령에 의해 심령이 부흥되면 반드시 거룩한 비전이 생긴다. 비전이란 큰 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비전이란 ‘거룩한 꿈’이다. 하나님을 위해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 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꿈이 비전이다.

 성령 안에서 거룩한 비전을 가지고 길 되신 예수님을 따라 누군가의 길이 되어주라. 그때 그 길은 하늘에 이르는 사다리가 된다. 예수님의 길을 따르지 않으면서 하나님 나라에 닿기를 희망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입과 발이 따로 움직이지 않도록 하라. 예수님이 걸어가신 희생의 길로 걸어서 하늘까지 이르는 비전을 가지라. 그리고 비전을 가진 것도 중요하지만 비전이 약화되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하기에 성령님이 필요하다. 성령충만으로 어떤 환경에도 무너지지 않는 ‘자기 극복의 역사’를 이루어 하늘나라의 지경을 넓히는 초석이 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