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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싶은 말들

[온라인새벽기도] 죽는 길이 사는 길이다

by manga0713 2018. 10. 8.

 

[이미지출처: 네이버 포스트 "흔적 생명, 영적 생명 / 제씨 펜 주이스 "십자가의 도"]

 

 

 

 

본문말씀 : 요한복음 12장 20-24절

20.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2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죽는 길이 사는 길이다 (요한복음 12장 20-24절)

< 자기의 부족함을 인정하라 >

 이틀 전 남양주 수락산에서 55세 여성이 산악회원들과 정상에서 하강하던 중 등반용 안전벨트에 걸었던 로프를 풀었다. 그때 동료들은 무모한 행동을 하지 말라고 소리쳤지만 그녀는 줄도 없이 맨몸으로 50cm 옆 바윗길로 발을 내딛었다가 실족해 30m 아래로 추락해 숨졌다. 그녀는 8년 경력의 클라이머로 평소 등반기구 없이 맨몸으로 바위를 오르는 볼더링(bouldering)을 즐겼는데 지나친 자기 과신이 화를 불렀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운동능력, 인지능력, 기억력, 판단력이 점차 떨어진다. 문제는 긴 세월에 걸쳐서 조금씩 떨어지기에 자신의 능력 저하를 잘 체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자기 몸을 너무 믿지 말라. 쉽게 할 것 같은 일도 막상 해보면 몸이 말을 잘 안 듣는다. 한 아빠는 딸 운동회 때 옛날 실력을 믿고 학부모 달리기에서 1등 하려고 사력을 다해 뛰었는데 생각대로 몸이 안 움직여 답답하고 창피했다고 했다. 사람의 능력은 40대와 50대가 크게 다르고, 50대와 60대가 크게 다르고, 60대와 70대가 크게 다르다.

 어르신들이 가끔 “내 몸 같지 않아.”라고 했던 말이 나이가 들면서 점차 자신에게도 실감된다. 젊을 때 운동 신경이 탁월했어도 나이가 들면 계단 하나 내려올 때도 조심해야 한다. 평형감각, 인지능력, 공간지각력 등이 옛날 같지 않아서 점차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는 것 같다. 기억력과 판단력도 점차 떨어진다. 다만 많은 경험을 통해 얻은 눈치나 지혜로 떨어진 능력을 커버해 사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외면하면 무지한 자기 과신으로 인해 남으로부터 무시당하고 소통능력 저하로 고집불통 이미지를 줄 수도 있다.

 또한 나이 든 사람끼리도 옛날 같지 않아서 서로 답답할 수 있다. 그때는 서로의 능력 저하를 불쌍히 여기고 이해심을 높여야 한다. 들을 때는 옛날보다 상대의 설명 능력이 떨어진 것을 이해해야 하고 말할 때는 옛날보다 상대의 이해 능력이 떨어진 것을 이해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나이가 들수록 나의 능력 저하를 인정하고 남의 의견을 지혜롭게 경청하고 수용하려는 자세다. 그래야 더 존중받고 존경받는다.

 한 목회자는 총회에 가기 전에 늘 다짐한다. “이번에도 예년처럼 발언을 힘써 자제하자.” 총회에 갈 때마다 그런 다짐을 하는 이유는 나이가 들면서 말하고 듣고 이해하고 반응하고 변화하는 능력이 이전보다 떨어짐을 인정하고 후배들의 기를 살려주고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다. 나이가 들어서 회의 때 소리가 커지고 남의 말을 중간에 끊어 반박하는 이유도 이해력과 기억력과 판단력의 저하와 깊은 관련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선배 목회자가 총회에서의 발언을 자제하면 후배 목회자들이 더 존중한다.

 카페에 가면 젊은이 그룹보다 어르신 그룹의 소리가 큰 편이다. 자기 청력이 약해져서 남도 그런 줄 알고 저절로 소리가 커지는 것이다. 그래서 카페에서 저도 의도적으로 말소리를 낮추려고 한다. 어르신은 자기가 크게 말하는 것을 잘 모를 때가 많고 젊은이들도 왜 저렇게 어르신들이 큰 소리를 내느냐고 의아하게 반응할 때가 많다. 결국 인정과 이해가 동시에 필요하다. 남이 이해해주기만 바라지 말고 내 부족함도 인정해야 갈등도 쉽게 풀린다.

 나이가 들어 지각력 저하를 인정해서 이전보다 조금 더 소리를 낮추려고 하고 판단력 저하도 인정해서 이전보다 덜 판단하려고 하라. 또한 기억력 저하도 인정해서 남의 말을 이전보다 더 경청하라. 나이가 들어 약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것을 인정해야 인생 후반기를 고귀하게 맞을 수 있다. 또한 그런 마음으로 어디서든지 남을 인정해주고 내 부족함을 인정해야 공동체에서도 하나 됨을 이룰 수 있다.

< 고난은 축복의 기회다 >

 본문은 하나 됨을 위해 필요한 중요한 원리를 교훈한다. 예수님이 백성들의 환호 가운데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어미 나귀 대신 어린 나귀를 탔다. 약하고 경험이 없는 어린 나귀도 예수님의 쓰임을 받았다. 아무리 부족해도 하나님이 쓰시려고 하면 쓰실 수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아가는 순수한 성도를 기뻐하신다.

 현재의 모습이 부족하고 연약해도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얼마든지 현실을 극복할 수 있다. 예수님은 힘이 없어서 삽자기를 지신 것이 아니라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십자가를 지셨다. 당시 상황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이유가 없었다.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의 입성을 환호하자 유대 교권주의자들이 낙담해서 말했다. “아무리 예수를 죽이려고 해도 소용없다. 온 세상이 저를 따른다(19절).”

 게다가 당시 상황을 목격한 헬라인 몇이 빌립을 통해 예수님께 면담을 요청했다(20-21절). 왜 면담을 요청했는가? 예수님을 헬라 지역으로 모셔서 최고 스승으로 삼고 명예와 부귀영화를 약속하려는 면담이었을 수도 있다. 그 면담 요청 사실을 듣고 예수님이 말씀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23절).” 출세 기회가 왔으니까 헬라 지역으로 가서 이름을 널리 날리자는 말인가? 아니다. 그때 예수님은 십자가를 각오하셨다.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에 십자가를 지고 죽을 생각을 하신 것이다.

 그 말씀을 일부 제자들이 오해해서 “이제 주님이 뜨시면 내게도 한 자리가 생기겠지.”라는 마음을 가지고 제자들 사이에 높은 자리에 대한 다툼도 있었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광을 얻을 때는 십자가를 질 때였다. 그처럼 큰 축복 전에는 대개 고통의 순간이 있다. 고난의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라. 그 십자가가 영광으로 가는 통로와 다리다. 영광과 축복을 오해하지 말라. 십자가가 없으면 영광과 축복도 없다. 죽어야 살고 헌신해야 복 받는다.

 어떤 교인은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죽어도 상황은 더 어려워지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완전히 죽지 않고 죽은 척 하는 것이 문제다. 때로 반전의 역사를 기대하며 선한 결심을 한다. “내가 죽자.” 그래도 상황과 인간관계가 나아지지 않으면 금방 자기가 살아나 하나님께 따진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 헌신하고 죽었는데 왜 아직도 문제가 그대로인가요?” 사람에게도 따진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내가 얼마나 참았는데 그렇게 나오느냐?”

 죽은 줄 알았더니 벌써 살아나 있다. 알고 보니까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척 한 것이다. 죽은 곳에서는 많은 선한 열매가 맺어지지만 죽은 척 한 곳에서는 선한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 선거 때 후보자들은 겸손히 허리를 굽히고 죽은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선거만 끝나면 어느새 허리는 펴지고 머리는 꼿꼿해지고 어깨는 뻣뻣해진다.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척 한 것’이다. 그런 정치인의 모습이 신앙생활에는 없게 하라.

 십자가가 없는 행복은 없다. 축복의 핵심 요소도 십자가의 헌신이다. 학생이 노력하지 않고 좋은 성적을 기대하거나 선수가 연습하지 않고 승리를 기대할 수 없다. 십자가를 회피하면 하나님의 축복도 그를 회피하지만 십자가를 기꺼이 지면 하나님도 기꺼이 축복을 내려주신다. 교회의 어떤 필요가 생각나거든 “하나님! 이 필요를 생각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리더십의 허락을 맡고 이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하고 나설 때 하나님은 그 마음과 헌신을 반드시 기억해주신다. 죽는 길이 사는 길이다.

< 죽는 길이 사는 길이다 >

 본문 24절을 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죽는 것은 ‘자기 희생과 자기 부인’을 상징한다. 희생이 없는 축복은 가치도 없고 진짜 축복도 아니다. 희생과 헌신을 동반한 축복이 진짜 축복이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당연하게 여기라. 삶에는 축복만 있지 않다. 기도 제목도 있어야 기도하는 성숙한 성도가 된다.

 불신자의 고난과 성도의 고난은 다르다. 불신자의 고난은 ‘당하는 것’이고 성도의 고난은 ‘행하는 것’이다. 신학 주제 중에 <The Passion of Christ(그리스도의 수난)>이란 주제가 있다. 최후의 만찬 후부터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까지의 사건과 의미를 다룬 주제가 <그리스도의 수난>이란 주제다. 수난이란 영어의 passion은 한국말로 ‘열정’으로도 뜻풀이된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예수님이 ‘열정적으로 맞이한 것’이란 암시다.

 성도의 고난은 어려운 환경을 수동적으로 맞이하는 것이나 순교 콤플렉스에 젖어 수동적으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열정적이고 능동적으로 맞이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매일 새벽기도는 쉽지 않지만 정열적이고 능동적으로 매일 해야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더 나아가 포용하라. 고난을 포용하고 고난당하는 자를 포용하는 것은 나를 위해 고난당하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고 예수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

 능동적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지면 신비한 축복이 따른다. 능동적인 고난은 더욱 큰 수동적인 고난을 미리 예방하게 한다. ‘당하는 수동적인 고난’을 통해 인생의 쓴 맛을 보는 삶보다 ‘행하는 능동적인 고난’을 통해 인생의 기쁨과 보람을 맛보는 삶이 훨씬 복된 삶이다. 능동적인 고난이 수동적인 고난을 막아줌을 기억하고 적극적이고 정열적으로 십자가를 추구하며 남과도 힘써 보조를 맞추라.
 
 나는 100미터 가고 싶지만 공동체와 보조를 맞추려고 50미터만 가는 것도 일종의 고난이다. 반대로 나는 10미터만 갔으면 좋겠지만 100미터를 목표로 한 사람과 보조를 맞추려고 50미터까지 나가려는 것도 일종의 고난이다. 내 처지와 기분만 생각하지 말고 남의 꿈과 비전도 힘써 생각해주고 서로 고난의 분량을 지면서 50미터 지점에서 만나려는 마음을 가지고 나아갈 때 하나님도 그 공동체에 복을 내려주신다.

< 하나 됨을 이루라 >

 행복은 하나 될 때 주어진다. 남을 위해 나를 제한하면서 남을 행복하게 해야 내가 행복해진다. 요새 혼자서도 행복하게 산다는 사람이 많다. 그것도 좋지만 둘이서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되고 다수의 공동체에서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되라. 결혼할 때도 “내가 저를 통해 어떻게 행복을 얻을까?”를 계산하면 오히려 행복이 멀어지지만 “내가 저를 어떻게 행복하게 할까?”를 생각하면 오히려 내게 넘치는 행복이 따라온다.

 하나 됨을 위해 값을 치르려고 하라. 양보하고 희생해야 하나 됨을 이룰 수 있다. 하나 됨을 위해 참고 희생하고 손해를 감수해야 되지만 하나 되지 못해서 생기는 큰 손해에 비하면 그 희생은 오히려 작은 것이다. 하나 됨을 위해 희생하고 특히 소수와 약자를 더욱 살피려고 하라. 소수와 약자가 아픔을 당하면 다수와 강자도 아픔을 당한다. 늘 겸손한 마음으로 바른 길에 선 약자와 소수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살펴줄 때 하나 될 수 있다.

 국립 대형 정신병원에 가보면 많은 병자를 의외로 적은 사람이 관리한다. 중무장도 필요 없다. 정신이 병들면 하나로 뭉쳐 응축된 힘을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신이 병들면 자기가 제일인 줄 알기에 둘도 의견을 합치지 못해서 숫자가 많아도 큰 힘이 생기지 않는다. 개인적이고 자기밖에 모르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이라는 마음이 정신을 병들게 하고 하나 됨을 막는다. 결국 교만은 축복과 행복의 최대 적이다.

 늘 겸손하게 살면서 쓸 수 있는 힘이 있어도 힘을 절제하고 할 말이 있어도 말을 절제하라. 할 수 있는 일도 다 하지 말고 갈 수 있는 길도 다 가지 말라. 전체의 큰 목적과 덕을 위해 나를 절제하며 오래 참으라. 남이 성숙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훈련도 잘하라. 술 취한 남편과 싸우지 말고 술이 깰 때까지 참고 술이 깬 후 지혜롭게 말하라.

 어떤 남편은 성격이 불같다. 남이 보면 안쓰러울 정도다. “저런 남편과 어떻게 살지?” 그런 부부도 그럭저럭 잘 산다. 왜 그런가? 남편의 미숙함을 참아주고 용납하기 때문이다. 찬송가에 이런 가사가 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아주소서.” 상대방의 습성과 성격 그대로 일단 받아들여야 행복의 기초가 다져진다. 늘 밀알의 원리를 기억하고 힘써 자기 죽음을 실천하며 살 때 나도 살고 너도 살고 남도 산다.

 예전에 우리나라는 용납하는 문화가 부족했다. 양반과 상놈을 구분하는 가치관이 심했다. 어느 성씨는 비천한 성씨라고 싸잡아 말했지만 사실상 훌륭한 인물 중에는 그 성씨 출신도 많다. 편견은 수고와 희생 없이 남을 깎아내리고 나를 높이려는 비열한 태도다. 불의한 편견과 자기중심적인 삶을 최대한 남의 장점을 찾아 기쁘게 하는데 조금 더 관심을 가지라. 남의 행복을 위해 나를 제물로 삼으려고 할 때 내 삶에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고 은혜와 행복도 넘치게 된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