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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고든 맥도날드]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by manga0713 2015. 3. 31.

 

 

 

 

Sinkhole 빠졌었습니다. 처음엔 그것이 sinkhole 몰랐습니다. 판단과 기준, 경험과 사람들에 의해 쉽게 벗어 있는 훈련소인 알았습니다.

 

헤매다 죽을 정도로까지 헤매다 하나님의 은혜로 빠져 나올 있었습니다. 경험을 잊지 않고, 은혜의 감격을 잃지 않고 죽을 힘을 것이라고 다짐 했었습니다.

 

다짐은 너무나 가벼웠습니다. 세상에 너무나 쉽게 날려가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두렵고 부끄러워 열심히 사는 달려나갔습니다. 그러나, sinkhole 나를 완전히 외면한 아니었습니다. 다시 어둠에 갇혀 헤매며 가슴을 쥐어 뜯는 고통의 날들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문득 삶의 sinkhole들의 공통점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시작의 전조와 시작과 과정 속의 마음과 행동, 그리고 빠져들어가는 시간, 헤어 나오고자 하는 모습. 모든 것에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 뭘까? 생각하던 차에 책을 만나 읽었습니다.

 

저는 야곱입니다.

에서와 달리 딱히 세울 없고 시절처럼 사회적으로 성공이라는 열매를 맺기에는 뭔가 부족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내게 이른 성공이 주어졌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그럴 없는 성공이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나요. 능력인 알았습니다.

내가 하는 , 내가 살아 날들을 온전히 살피지 못했던 것이지요. 나는 나를 구분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무지가 거짓을 낳고 거짓은 황금새장을 지어 나를 가두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나의 세계는 황금새장 안이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누구나가 인정하는 황금이 아닌 내가 행한 거짓이 꾸며 거짓 황금이었습니다.

 

안에 있던 나만 몰랐던 사실이었습니다.

나는 거짓된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침묵할 없었습니다. 지속적인 거짓으로 악의 기억력을 키워와 결국은 내가 나를 구분하지 못하는 실정까지 오게 것입니다.

 

내겐 다시 시작할 있는 출발점,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출발점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는 지식의 쌓음이 필요합니다. 날마다 깨끗이 성화되어 가는 삶의 기쁨이 필요합니다.

 

고요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속의 깊은 곳을 온전히 고백합니다.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 은혜를 간구합니다.

이제 세상 밖으로, 변화된 삶의 열매를 향해 나아 갑니다.

 

흔들리는 크리스천들께 책을 권합니다.

 

다음은 책의 밑줄 부분입니다.

 

서문: 벽에 부딪치다

 

나는 의도적으로 삶을 재 정돈하리라고 결심했고, 최선을 다해 천부적인 재능에 기초한 삶과 사역의 길에서 뛰쳐나와 훈련과 의도성(intentionality) 기반을 길로 바꾸겠다고 마음먹었다. 책의 제목에 따라 표현하자면, 내면 세계의 질서를 바로잡기로 다짐한 것이다.

 

내면 세계의 질서는 속마음으로부터 변화되는 문제이지 외부가 바뀌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어떤 도구들을 사면 삶이 깔끔하게 정리될 것이라는 유혹에 너무나 많이 빠진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런 장비들은 잊어버리고 속마음, 당신의 내면 세계로부터 시작하라.

 

(리얼리티 "생존자 Survivor"에서 최종 결선까지 살아 남은 제리) 삶이 치열해지면서 그녀는 자신이 진정 원하지 않았던 성품이 표출되는 것을 발견하고는 놀라는 듯했다. 제리의 세계와 비슷한 현실 세계에서도 우리의 내면 세계를 도외시하고픈 유혹이 있다. 그것은 설사 무시되더라도 외부 세계만큼 소리로 아우성치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는 함몰 웅덩이처럼 무너져 내리기 전에는 상당히 오랫동안 주목을 받지 않고도 유지될 있다.

 

삶에 긴장과 압력이 가중될 , 우리는 삶의 조종실로 가는 대신 빨리 뛰고, 강력하게 저항하고, 많이 쌓고, 많은 정보를 모으고, 나은 전문가가 되려 하는 것일까? 우리 시대는 내면 세계보다는 외적인 부분의 온갖 소소한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내면 세계만이 우리가 어떤 외부의 폭풍이라도 헤치고 극복할 있는 힘을 얻을 있는 유일한 장소인데도 말이다.

 

그분은 우리를 내면 세계로부터 외부 세계를 지향할 가장 있도록 만드셨다.

 

마음을 지키거나 보호하는 , 내가 인간 경험에서 '조종실'이라고 언급한 것은 사람이 의도적으로 절제력을 발휘하여 선택해야 사안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우리는 반드시 마음을 지키기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선택하라! 마음의 건강과 생산성을 그저 당연하게 여겨서는 되며, 계속해서 보호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동기부여

 

쫓겨 다니는 사람의 증상

쫓겨 다니는 사람은 오직 무엇인가를 성취했을 때에만 만족감을 느낀다.

이러한 사람은 삶을 오직 결과의 측면에서 본다. 그렇기 때문에 결과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쫓겨 다니는 사람은 성취를 표시하는 상징에 집착한다.

그는 권력이라는 개념을 의식하고 그것을 소유하여 행사하기 위해 애쓴다.

 

쫓겨 다니는 사람은 보통 고삐 풀린 팽창욕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가 소위 축복이라고 부르는 것이 부르심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에 좌우되는 것이 아닌지 다시 점검해야 것이다.

 

쫓겨 다니는 사람은 온전한 인격에는 관심이 없는 경향이 있다.

목표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윤리적 타락도 감수하게 된다. 쫓겨 다니는 사람은 무서울 정도로 실용주의적인 사람이 되어 버린다.

 

쫓겨 다니는 사람은 대인 관계 기술을 닦는 신경 쓰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그는 어떤 일이든 내고야 마는 성격이지만 과정에서 사람을 파괴할 있다는 것이다.

 

쫓겨 다니는 사람은 보통 경쟁심이 강하다.

그들은 모든 일을 승패를 가르는 게임으로 본다. 그리고 쫓겨 다니는 사람은 당연히 자기가 이겨야 하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 멋있게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쫓겨 다니는 사람은 화산처럼 격렬한 분노를 품고 있다.

안타까운 현실은, 쫓겨 다니는 사람 주위에 있는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심한 상처를 받으면서도 충격을 그대로 감수한다는 것이다. 사장 혹은 지도자가 일을 하는 유능한 인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때로는 아무도 그들과 맞설 용기나 능력이 없기 때문에 격렬한 분노와 그로 인한 피해가 묵인되고 있다.

 

쫓겨 다니는 사람은 대개 비정상적으로 바쁘고, 노는 것을 싫어하고, 영적인 예배를 피한다.

사실 그들에게 일어날 있는 최악의 사태가 있다면 누군가가 출구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갑자기 일이 줄어들면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쫓겨 다니는 이에게는 바쁜 것이 습관화되어서 삶과 사고를 지배하는 방식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들은 바쁘다고 투정하면서 동정을 받기를 즐기면서도 변화되기는 원치 않는다.

 

내가 배워야 했던 교훈은 그런 성향은 날마다 깨끗이 성화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내를 비롯한 가까운 사람들에게 귀 기울여 내게 통제불능의 쫓기는 성향이 나타나는지 보아야 했다. 또한 정기적으로 자기 점검을 하면서 내가 세우는 계획, 발휘하는 리더십, 설정하는 목표 등이 쫓겨 다니는 자보다는 부름 받은 자의 모습을 반영하도록 애써야 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임으로써 중심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법을 배워야 했다. 삶이 언제든지 쫓김의 정신에 지배될 있음을 간과한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가지 외적 특징(, 매력적인 외모, 건장하고 발달된 체격) 모두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그에게 아주 유리하게 작용했다. 특히 무엇보다도, 특징들은 그에게 일종의 카리스마를 부여하여 굳이 지혜로운 마음이나 영성을 계발하지 않더라도 그로 하여금 일찍 성공을 거두게 만들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빠른 출발을 것이다. ~ 그는 달변가였다고 한다. 군중 앞에서 매우 유창하게 연설을 하는 사람이었다. 견고한 내면 세계를 계발할 필요를 느끼기도 전에 권력을 공고히 하고 명망을 얻을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자마자 성공은 너무 빨리 찾아왔다. 그래서 그는 인생의 한계를 깨닫지 못했다. 자기도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과 자기 백성에 대한 책임을 생각하는 데조차 시간을 들이지 않았다. 쫓겨 다니는 자의 증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쫓겨 다니는 자의 내면 세계는 무질서하다. 그의 새장은 번쩍거리는 황금으로 만들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덫에 불과하다. 안에서는 아무것도 오래가지 못한다.

 

쫓겨 다니는 사람도 과연 변화될 있을까? 물론이다. 그러한 변화는, 쫓겨 다니는 사람 스스로가 자신이 부르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충동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데서 시작된다.

 

사울과 요한의 대조점을 가장 생생하게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의 개인적 정체성과 직업적 안정이 위협을 받을 때였다.

 

우리는 일단 무엇인가를 소유하면 그것을 쥐고 지켜야만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요한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무리를 사로잡았을 , 요한은 그들을 그분께 돌려드리는 것이 너무도 기쁠 뿐이었다.

 

자신이 어떤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출발점이다. 그리고 요한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어떤 환상에도 빠져 있지 않았다.

 

내면 세계가 무질서한 사람들은 ~ 자신이 하는 일과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요한) 그의 내면 세계는 정말 정돈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릇된 자기 인식이 초래할 무시무시한 결과를 꿰뚫어 있었다.

 

부름받은 자는 뒤로 발자국 물러나서 손을 놓아야 때를 미리 내다보면서 산다.

 

부름받은 사람은 자신이 청지기임을 알고 있다.

부름받은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

부름받은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목적 의식을 갖고 있다.

부름받은 사람은 굳은 헌신을 몸소 실천한다.

 

광야에서 요한은 종교와 선악,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자기 세대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 아주 특별한 과업을 수행하는 필요한 특별한 민감성과 용기를 계발하게 되었다. 광야는 그의 내면 세계가 만들어지는 공사 현장이었다.

 

광야에서 우리는 메마름에 대해 배운다. 광야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의지하는 법을 배운다. 광야에서 우리는 부름을 받을 있다.

 

광야와 같은 고초를 겪어 사람만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맡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광야에는 달리 의지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조금 밝은 측면도 있다. 광야는 개개인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계획하고 준비할 있는 장소이다.

 

헨리 나우웬이 멋지게 표현했듯이, 미미함, 숨겨짐, 무력함을 안아야 때인 것이다. 솔직히 나는 다른 것들을 끌어안고 싶은 심정이지만 이것이 십자가의 길이요 부름받은 자의 길이다.

 

 

시간 사용

 

자기 훈련 없이는 누구도 탁월한 인물이 적이 없으며, 그러한 인물이 되었다 해도 자기 훈련 없이 상태를 계속 유지한 경우는 없었다.

 

한정된 수입에 맞춰 예산을 세우듯이, 한정된 시간에도 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무질서한 사람은 먼저 예산 작성의 기본을 배워야 한다. 말은 써야 경상비와 하고 싶은 일에 소요되는 임시비를 철저히 구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은 자신의 사명을 분명히 이해하고 계셨다는 점이다. 그분께는 이루어야 커다란 과업이 있었고, 사명에 맞추어 시간을 조정하셨다.

 

그분은 스스로의 한계를 알고 계셨다.

 

영적 전쟁이 시작될 때는 우리의 연약함을 보강하기 위해 내적인 힘과 결의를 모으는 적절한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는 것이다.

 

방치된 시간은 약점을 향해 흐른다.

방치된 시간은 자신의 세계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의 영향력에 의해 좌우된다.

방치된 시간은 온갖 긴급한 일에 소모된다.

방치된 시간은 대중의 갈채를 받는 일에 쓰이게 마련이다.

 

 

지혜와 지식

 

그는 아무리 뛰어난 재능과 힘을 가진 사람이라도 끝까지 경주를 마치기 전에는 승리를 장담할 없다는 것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구간을 선두로 뛰었다 해도 끝에서 하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경주는 마지막까지 꾸준한 속력으로 뛰어야 한다. 그리고 훌륭한 주자는 경주의 마지막 코스에서 최종 스퍼트를 준비도 되어 있어야 한다. 운동 로서 소질이 있다 해도 인내력을 겸비하지 못하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내면 세계에 질서를 잡는 일은 강한 정신적인 인내와 그러한 인내의 열매인 지적 성장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성은 사고하고, 분석하고, 혁신할 있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내면 세계의 질서가 온전히 잡힌 사람들은 사고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연구한다. 그들의 정신은 깨어 있고 활발하게 활동하며 매일 새로운 정보를 입수하고 정규적으로 새로운 발견과 결론을 창출해 낸다. 그들은 매일같이 정신을 단련시키기로 다짐한다.

 

사고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주변의 지배적인 문화에 영향을 받아 모양으로 빚어질 것이다. 그러나 변화 받은 사람(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롭게 ) 사고하고 반추하고 삶과 실재의 의미에 대해 독자적인 결론을 내리는 일에 부지런할 것이다.

 

다음 가지 요소가 계발되지 않는 생명력 있는 기독교란 불가능하다. 바로 내적으로 헌신하는 , 외적으로 섬기는 , 지적으로 합리적인 삶이다. [엘튼 트루블러드]

 

행동하는 사람은 현재를 소유한다. 그러나 사고하는 사람은 연구를 통해 미래를 얻는다. [올리버 웬델 홈즈]

 

그리스도인의 입장은 하나님을 지성(mind - 지적인 ) 다하고 마음(soul - 의지적인 ) 다하고 (strength - 신체적인 )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이다. 전인격적으로 -지성, 감정, 의지, -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 그것이야말로 참된 그리스도인을 만들고 참으로 균형 있는 강한 성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스탠리 존스]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한다는 사람이라면 사고하는 면에서도 창조주의 탁월성을 덧입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놀라운 능력 ~ 생각하는 사람은 묵은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 가설을 분석해서 거짓으로부터 참을 가려낼 안다. 생각하는 사람은 때로 오래 진리를 새로운 언어와 형식으로 기술하고, 다른 사람들이 진리를 삶에 적용하도록 도와준다. 그들은 또한 대담한 결정을 내리고,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비전을 보도록 하며,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방법으로 장애를 극복해 낸다.

 

지적으로 성장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마치 여러 장이 붙은 읽히지 않은 책과 같다. 책처럼 어느 정도 사용 가치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자기의 지성을 계발하고 예리하게 연마하기로 작정한 경우에 지니게 가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내면 세계의 지성 계발을 위한 :

우리의 지성은 기독교적으로 사고하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우리의 지성은 하나님이 창조 세계 안에 기록해 두신 메시지를 관찰하고 이해할 있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우리의 지성은 공적 세계에 속한 사람들을 섬길 목적으로 정보와 아이디어와 통찰을 추구하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내면 세계에 지적인 체계를 세우는 방법

경청하는 사람이 됨으로써 성장한다.

독서를 통해서 성장한다.

공부 훈련을 통해서 성장한다.

 

경청하는 사람이 되는 첫걸음은 질문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 적절한 질문은 가치 있는 정보를 이끌어내고 그것은 성장을 촉진한다. ~ 질문을 던질 우리는 배우게 아니라 격려하고 사랑할 수도 있게 된다.

 

우리는 들음으로써, 적극적으로 귀담아 들음으로써 성장한다. 질문을 던지고,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사람들이 스스로 내린 선택으로 겪게 되는 좋거나 나쁜 결과를 보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독서를 하고 있지 않다면 그는 성장하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가 성장하고 있지 않다면 무력한 삶을 향해 급속도로 곤두박질치고 있을 확률이 높다.

 

방어적인 공부, 공격적인 공부

 

우리는 공격적인 공부를 열심히 훈련할 비로소 성장한다.

 

그들의 내면이 흐트러져 있는 이유는 시대의 지식과 도전에 대처할 만큼 자신의 지성을 계발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발견하고 즐기고 사용하도록 주신 모든 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이다.

 

 

영적인

 

영적 훈련을 시작하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 특권을 잃게 된다.

창조 의도된 대로 영원하고 무한한 관점으로 실재를 보고 누리는 법을 결코 배울 없을 것이다.

살아 있고 생명력 있는 그리스도와의 교제다.

하나님께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두려움이다.

창조주 하나님에 비할 우리 자신이 얼마나 왜소한지를 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거꾸로 우리가 그분의 아들과 딸로서 특별하고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잊어버린다.

실패, 치욕, 고난, 사랑하는 이의 죽음, 고독 등과 같은 위기의 순간에 대처할 만한 저력이나 투지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내면의 영적 세계를 정돈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오셔서 말씀하실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음성은 지금까지 들었던 어떤 음성과도 다르리라.

 

영적 훈련 가지: 침묵과 고독의 추구, 규칙적으로 하나님의 음성 듣기, 사색과 묵상의 경험, 예배하고 중보하는 기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은 우리 삶의 매순간을 문명의 소음으로 뒤덮으려고 음모를 꾸며 왔다. 그런 소음은 그냥 방치되면 하나님의 음성을 압도하기 십상이다. ~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외부 세계의 방해 소리를 차단하는 마음의 방음 장치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침묵의 기도 속에서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외적인 활동 영역에서 많이 베풀 있다. 사람들의 영혼을 만지기 위해서 우리는 침묵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말하는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면 세계의 정원을 가꾸려면 침묵과 고독의 시간을 따로 확보해야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 의식적으로 듣는 훈련을 해야 한다.

 

우리가 고독과 침묵 중에 듣게 되는 것들은 내면화되어야 한다.

 

영적 훈련의 셋째 단계인 '엔터' 치는 것은 성찰과 묵상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빈손을 보시면 주신다고 어거스틴은 말한다. 손에 짐을 가득 들고 있는 사람은 선물을 받을 없다. 짐이 반드시 죄나 세상적인 염려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야단법석을 떨면서 그분을 예배하려는 노력일 수도 있다. 우리의 기도를 가장 자주 방해하는 것은 어떤 엄청난 혼란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일 경우가 많다. , 기도가 끝난 해야 일이나 피하고 싶은 일과 같은 말이다.

 

내면의 기도가 잠자리에 들기 마지막 행동이 되고 잠에서 처음 행동이 되도록 하라. 그러면 머지 않아 로렌스 형제와 같이 '성령의 폭풍을 지닌 사람은 자는 중에도 앞으로 전진한다' 사실을 알게 것이다. [토머스 켈리]

 

(중보)기도가 어려운 가지 이유

예배와 중보기도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예배와 중보기도는 우리의 나약함을 암묵적으로 시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가 때때로 실제적인 결과와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오직 행동으로만 무언가를 성취할 있다고 은연중에 배워 왔다. 그런데 기도는 일종의 행동 부재로 보인다. 내면이 무질서한 사람에게는 그것으로는 아무것도 성취할 없는 것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주문대로 배달되듯이) 우리는 우리가 구상한 대로 결과를 얻는 익숙해져 있다 ~ 때문에 우리는 때로 기도에 실망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 편에서 기도의 결과를 예측할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이상 기도를 유효한 방편으로 보지 않고 직접 나서서 원하는 결과를 얻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예배와 중보기도는 자신의 목적에 하나님을 맞추려고 구하는 것이라기보다 그분의 목적에 나를 맞추는

 

기도 가운데 예배한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보여 주신 그분의 일하심과 그분 자신에 관해 하신 말씀을 우리 영이 기뻐하는 것이다.

 

 

회복

 

안식일은 무엇보다도 온전한 하루다.

 

안식일의 쉼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족이 자들과 드리는 예배를 의미한다.

안식일은 개인 생활에서 쉼과 고요함을 의식적으로 환영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을 했기 때문에 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쉼을 명하셨고 쉼이 필요한 존재로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쉬는 것이다.

 

 

후기:물레질

 

어떻게 그렇게 나갈 있을까? 물레질과 같은 경험을 추구할 가능하다. 물레질이란 시간을 우선 순위에 따라 질서 있게 계획하고, 생각의 주파수를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발견하도록 맞추고, 영적으로 더욱 예민해지고, 평온한 안식일의 쉼을 누릴 있도록 고요한 중심부 속으로 물러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면 세계다. 진정한 주의를 기울이면 질서정연한 상태가 되는 세계다.

 

진심으로 그렇게 살고 싶은 의지가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