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인 내가 보기에도 안쓰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왜? 무엇이? 고양이 눈에 비친 인간 군상의 모습 때문입니다.
"인간이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애써 입을 움직이면서, 재미있지도 않은 일에 웃고, 시답잖은 일에 기뻐하는 것밖에 재주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조금은 두렵기도 했지만, 지금 얘기를 듣고 나니 갑자기 같잖게 느껴졌다. 그는 왜 두 사람의 얘기를 잠자코 듣고만 있지 못할까. 지고 싶지 않은 욕심에 공연히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늘어놓아 무슨 이득이 있을까.
(그들의) 그 속내에는 세속적인 명예욕도 있고 욕심도 있다. 그들의 평소 대화에 남을 이기려는 마음과 경쟁심도 언뜻언뜻 엿보이는 터라, 여차하면 그들이 늘 욕을 해대는 속물과 한통속이 될 우려도 있으니 고양이인 내가 보기에도 안쓰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다만 그들의 말과 행동거지가 어설픈 지식만 가지고 모든 걸 다 아는 척하는 사람들처럼 뻔뻔스럽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 할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이 고양이라니! 도대체 어떤 고양이이길래 이럴 수 있는 걸까? 이 고양이가 하나의 에피소드를 통해 스스로 다짐한 마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양이 역시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적 동물인 이상 아무리 드높은 뜻을 가졌다 한들 어느 정도 사회와 조화를 이뤄야 한다. 주인과 안주인과 하녀와 산페이 군이 나를 제대로 평가해 주지 않는 것은 유감스럽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쳐도, 어리석음의 결과로 내 껍질을 벗겨 샤미센 가게에 팔아 치우고, 살을 토막 내어 산페이 군의 밥상에 올리는 무분별한 일을 행한다면 이는 실로 큰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머리로 활동하라는 하늘의 명을 받고 이 험난한 세상에 왔을 만큼 고금을 막론한 희귀한 고양이이므로 몹시 소중한 몸이다. <천금지자 좌불수당(千金之子 坐不垂堂)>이라는 말도 있듯이 남보다 뛰어난 것을 자만하여 공연히 내 신상에 화를 초래하는 것은 나의 재난임은 물론이요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다. 사나운 호랑이도 동물원에 들어가면 똥 묻은 돼지 옆에 자리를 잡고 거대한 기러기도 산 채로 잡혀 양계장에 들어가면 닭과 같은 도마 신세를 지게 된다. 따라서 범부들과 같이 사는 나 역시 범묘로 처신할 수밖에 없다. 범묘가 되려면 쥐를 잡아야 하니, 나는 끝내 쥐를 잡기로 결심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일본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나쓰메 소세키'의 처녀작입니다.
책 뒤 표지에 소개된 내용을 보면, "나쓰메 소세키는 자신의 처녀작이자 일본 근대 소설의 최고봉으로 손꼽히는 이 작품을 통해 전통과 서구 문명, 정신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 사이에서 흔들리던 20세기 초 일본의 인간 군상의 모습을 풍자적이면서도 섬세하게 그려 내고 있다."
참 잘된 설명인 것 같습니다.
당시의 일본인 군상뿐만 아니라 현재를 사는 우리네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늘 태평하게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을 두드려 보면 어디에선가 슬픈 소리가 난다."라는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쓴 글입니다.
자신의 어디에선가 슬픈 소리를 울려내는 빈 곳을 채우려, 듣지 않고 말을 내고, 높이지 않으며 높은 채하고, 양보 없이 이기려다 보니 몸 누일 곳을 찾아가는 어스름 어둠이 슬픈 현대인의 모습이 되고만 것이지요.
저자는 그런 억지 적응을 떠나기 위해 거울에 비쳐진 자신을 내려 놓으라 합니다.
거울에 비쳐진, 상대에게 비쳐진, 사회의 기준에 비쳐진 자신을 모습을 내려 놓으라 합니다.
비쳐진 모습…..내려 놓아야지요.
저자가 한 호흡에 쓴 것이 느껴지는 글입니다. 꼭 한 번 읽어 보십시오.
다음은 이 책의 밑줄 친 부분 입니다.
인간의 심리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없다. 지금 주인이 화를 내고 있는 것인지, 들떠 있는 것인지, 또는 철학자의 유서에서 한 가닥 위안을 구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다. 세상을 조롱하고 있는 것인지, 세상에 섞이고 싶은 것인지, 사소한 일에 짜증이 나 있는지, 세상에 초연한 것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고양이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두 단순하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화가 나면 화를 내고, 울 때는 죽어라 하고 운다. 게다가 일기 같은 씨잘 데 없는 것은 절대 쓰지 않는다.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주인처럼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은 일기라도 써서 세상에 드러내 보일 수 없는 자신의 속내를 풀어 놓아야 하겠지만, 우리 고양이족은 먹고 자고 싸는 생활 자체가 그대로 일기이니 굳이 그렇게 성가신 일을 해가면서 자신의 진면목을 보존해야 할 것까지는 없다. 일기를 쓸 시간이 있으면 툇마루에서 잠이나 즐길 일이다.
인간이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애써 입을 움직이면서, 재미있지도 않은 일에 웃고, 시답잖은 일에 기뻐하는 것밖에 재주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조금은 두렵기도 했지만, 지금 얘기를 듣고 나니 갑자기 같잖게 느껴졌다. 그는 왜 두 사람의 얘기를 잠자코 듣고만 있지 못할까. 지고 싶지 않은 욕심에 공연히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늘어놓아 무슨 이득이 있을까.
(그들의) 그 속내에는 세속적인 명예욕도 있고 욕심도 있다. 그들의 평소 대화에 남을 이기려는 마음과 경쟁심도 언뜻언뜻 엿보이는 터라, 여차하면 그들이 늘 욕을 해대는 속물과 한통속이 될 우려도 있으니 고양이인 내가 보기에도 안쓰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다만 그들의 말과 행동거지가 어설픈 지식만 가지고 모든 걸 다 아는 척하는 사람들처럼 뻔뻔스럽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 할 것이다.
세상에는 나쁜 짓을 하면서도 자신은 한없이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 자기에게는 죄가 없다고 자신하면 당사자의 마음이야 편하겠지만, 남이 처한 곤경이 그 편한 마음 덕에 소멸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지전능은 경우에 따라 무지무능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 이것은 명백한 역설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만사를 알게 되고 만사를 알다 보면 기쁘기도 한 한편 날로 위험이 커지니 날로 방심할 수 없어진다. 교활해지는 것도 비열해지는 것도 표리일체인 호신용 갑옷을 두르는 것도 모두가 만사를 아는 결과요, 만사를 안다는 것은 나이를 먹은 죗값이다.
하지만 고양이 역시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적 동물인 이상 아무리 드높은 뜻을 가졌다 한들 어느 정도 사회와 조화를 이뤄야 한다. 주인과 안주인과 하녀와 산페이 군이 나를 제대로 평가해 주지 않는 것은 유감스럽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쳐도, 어리석음의 결과로 내 껍질을 벗겨 샤미센 가게에 팔아 치우고, 살을 토막 내어 산페이 군의 밥상에 올리는 무분별한 일을 행한다면 이는 실로 큰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머리로 활동하라는 하늘의 명을 받고 이 험난한 세상에 왔을 만큼 고금을 막론한 희귀한 고양이이므로 몹시 소중한 몸이다. <천금지자 좌불수당(千金之子 坐不垂堂)>이라는 말도 있듯이 남보다 뛰어난 것을 자만하여 공연히 내 신상에 화를 초래하는 것은 나의 재난임은 물론이요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다. 사나운 호랑이도 동물원에 들어가면 똥 묻은 돼지 옆에 자리를 잡고 거대한 기러기도 산 채로 잡혀 양계장에 들어가면 닭과 같은 도마 신세를 지게 된다. 따라서 범부들과 같이 사는 나 역시 범묘로 처신할 수밖에 없다. 범묘가 되려면 쥐를 잡아야 하니, 나는 끝내 쥐를 잡기로 결심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참 사치스럽다. 날것으로 먹어야 마땅한 것을 굳이 익히고 굽고 식초에 절이고 된장을 바르고, 불필요한 품을 들여 가면서 좋아라들 한다. 입는 옷도 그렇다. 불완전하게 태어난 인간이 고양이처럼 1년 내내 단벌로 버티기야 어렵겠지만, 그렇게 잡다한 것을 피부 위에 걸치고 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양에게 폐를 끼치는가 하면 누에에게는 신세를 지고 목화밭의 온정까지 구하는 것을 보면 사치는 무능의 결과라고 단언해도 좋을 정도다. 입고 먹는 것이야 너그럽게 봐주어 넘어간다 치고, 생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일까지 이런 식으로 처리하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우선 털이 그렇다. 털은 자연스럽게 나는 것이니 그냥 내버려 두는 편이 가장 간편하고 당사자에게도 좋을 텐데, 그들은 쓸데없는 짓까지 해가면서 잡다한 모양을 만들어 놓고는 우쭐해한다. 중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늘 민머리다. 더우면 그 위에 갓을 쓰고 추우면 모자를 쓴다. 그럴 것이면 뭐하러 머리를 박박 밀어 시퍼렇게 해 가지고 다니는지 알 수 없지 않은가. ~ 그렇게 자기 몸을 가지고 안달해서 어쩌자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이렇게 한가한 사람들이 한데 모였다 하면 나도 바쁘다 너도 바쁘다 떠들어 댈 뿐 아니라 그 안색까지 정말 바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자칫 분주함에 쫓겨 숨이 꼴까닥 넘어가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좀스러워 보인다.
실제로도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예복을 입고서 제국 호텔을 드나들지 않는가. 그렇게 입고 다니는 이유를 물으면 뭐라 대답하지 못한다. 그저 서양 사람들이 입으니까 입는다고 할 뿐이다. 서양 사람들이 강하니까 억지라고 바보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떻게든 흉내를 내지 않고서는 못 견디는 것이다. 긴 것에는 감겨라, 강한 것에는 굽혀라. 무거운 것에는 눌려라. 그렇게 명령어에 짓눌려 살다니 비굴하지 않은가. 비굴해도 어쩔 수 없다고 한다면야 나도 너그러이 이해해 줄 테니, 일본 사람이 위대하다는 생각은 그리 하지 말 일이다.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고 경쟁하듯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 나머지 결국은 제비 꼬리를 닮은 기형까지 출현했다. 잠시 뒤로 물러나 그 유래를 생각해 보면. 억지로, 마구잡이로, 어쩌다 우연히, 막연하게 생겨난 것이 절대 아님을 알 수 있다. 모두가 이기고 싶고 누르고 싶은 경쟁심에 매달린 나머지 다양한 새것이 등장한 것이요, 나는 너와 같지 않다고 공언하며 다니는 대신 옷을 뒤집어쓰고 다녔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심리를 통해 일대 발견이 가능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연은 진공을 꺼린다>는 말처럼 인간은 평등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거울은 자만의 제조기이며 동시에 소독기이다. 화려함을 좇는 허영심으로 대하면 거울만큼 어리석은 자를 선동하는 도구도 없다. ~ 하지만 자신에게 넌더리가 나거나 자아가 위축되었을 때 거울을 보는 것만큼 약이 되는 일도 없다. 자신의 아름다움과 추함이 명백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런 얼굴로 용케 오늘까지 사람입네 하고 거드름을 피우며 살아왔다고 깨닫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애 중에서 그렇게 깨달을 때가 가장 다행스러운 순간이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아는 것만큼 존귀한 일도 없다. 스스로를 대단하다 여기는 모든 자들은 이런 자각에 이른 얼간이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황송해해야 한다. 본인은 당당하게 자신을 경멸하고 비웃을지언정, 보는 사람 쪽에서는 그 당당함에 감복해서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이다.
탐정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20세기 사람들이 대체로 탐정처럼 구는 경향이 있는 건 어째서일까? ~ 내가 오랫동안 생각해 온 문제인데, 나는 요즘 사람들에게 탐정처럼 구는 경향이 있는 건 개인의 자각심이 지나치게 강한 것에 원인이 있다고 해석하네. 그리고 내가 자각심이라 말하는 것은 도쿠센 군이 말하는 견성성불이나 자신과 천지가 동일하다고 하는 깨달음의 경지와는 다른 것일세
요컨대 요즘 사람들은 자기와 타인의 이해관계에 깊은 골이 존재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말일세. 그런 자각심이 문명이 발달하면서 하루하루 예민해지기 때문에 결국은 일거수일투족조차 자연스럽게, 마음대로 할 수 없어졌다는 걸세.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라는 사람이 스티븐슨을 평하기를, 그는 방에서 거울 앞을 지날 때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을 정도로 한시도 자신을 잊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추세를 잘 표현하고 있는 말이지. 눈을 감아도 나, 눈을 떠도 나, 이 나란 것이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도처에 따라다니니까 인동의 행동거지가 인위적이고 좀스러워진 거야. 스스로도 답답하고, 세상도 숨이 턱 막히고, 아침부터 밤까지 맞선을 보는 남녀 같은 심정으로 지내야 하는 거야. 유유자적이니 느긋함이니 하는 말은 글자는 있어도 의미는 없는 말이 되고 말았지.
구샤미 자네의 설명이 내 의견을 대변하고 있군. 옛사람들은 자신을 잊으라고 가르쳤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자신을 잊지 말라고 가르치니, 전혀 다르지. 하루 종일 자신을 의식하느라 정신이 없어. 그러니 한시도 평안할 수가 없지. 일상이 초열지옥(焦熱地獄)이야. 천하의 명약이 무엇이냐, 자신을 잊는 것만큼 용한 약은 없지.
사람들은 보통, 문명이 발달하면서 살벌한 기운이 없어지고 개인과 개인 사이가 온화해졌다고 하는데, 그건 큰 착각이야. 그렇게 자각심이 강한데 어떻게 온화해질 수 있겠나. 언뜻 보기에는 아주 조용하고 아무 탈 없는 것 같아도, 서로는 몹시 힘겹고 팽팽한 관계에 있지. 마치 씨름 선수가 모래판 한가운데에서 서로의 샅바를 잡고 꼼짝 않고 버티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늘 태평하게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을 두드려 보면 어디에선가 슬픈 소리가 난다.
'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든 맥도날드]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0) | 2015.03.31 |
---|---|
[니시우치 히로무] 빅데이터를 지배하는 통계의 힘 (0) | 2015.03.20 |
[이지웅] 말씀을 읽다 (0) | 2015.03.06 |
[조나단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 (0) | 2015.02.10 |
[네이트 실버] 신호와 소음 (0) | 2015.0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