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듯 김정운 교수의 새 책 '에디톨로지'를 읽어 나갔다.
책의 끄트머리에 그는 좋아하는 사람의 잡답이 아닌 '지적 질'로 돌아섰다. 물론 김정운 교수의 이야기를 듣는 내가 '지적 질'로 들었다는 이야기다.
무조건 줄줄 읽어대고 밑줄 긋고 정리하는 미련한 내게 준 그의 '지적 질'이란 이런 거다.
'주체적 책 읽기', 그래야만 "독서는 내가 가진 개념과 저자의 개념이 편집되는 에디톨로지 과정이다. 그래야만 저자의 생각이 내 생각의 일부가 된다." 그렇기에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목적이 분명"해야 하며 그 과정을 통해 "창조적인 '내 생각'"이 나올 수 있다.
김정운 교수는 '창조 행위'와 "창조적인 '내 생각'"을 펼칠 수 있는 기반과 방법으로 '에디톨로지 (편집학)'를 제시한다.
끊임없이 구성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편집'이라는 창조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 '자신의 이론'을 만들어 갈 것을 촉구 한다. 그 과정에 데이터베이스의 축적과 활용이라는 팁도 제시한다.
쉽게 전하기 위해 애쓴 모습도 보인다.
참 고마운 책이다.
다음은 이 책의 밑줄 친 부분이다.
○ 지식과 문화의 에디톨로지
모든 창조적 행위는 유희이자 놀이다. 이같이 즐거운 창조의 구체적 방법론이 바로 '에디톨로지'다. 세상의 모든 창조는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또 다른 편집이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하나도 없다! '창조는 편집이다.'
'지식-정보-자극', 에디톨로지는 이 세 가지 개념에 대한 새로운 정의에서 출발한다.
생각의 본질이 '어디선가 본 것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라면, 창의적 사고란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보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창조적 사고는 이 같은 일상의 당연한 경험들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된다. 이를 가리켜 러시아 형식주의의 대표적 이론가 시클롭스키Shklovsky는 '낯설게 하기 ostranenie'라고 정의한다. 인간의 가장 창조적 작업인 예술의 목적은 일상의 반복과 익숙함을 낯설게 해 새로운 느낌을 만드는 데 있다는 거다.
미학이 빠져 있는 창조는 막힌 길이다.
정보가 부족한 시대가 아니다. 다양한 방식의 편집이 가능한 지식 편집의 시대다. 인터넷상의 편집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은 종이 신문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수십만 명의 트위터 팔로워를 가지고 있는 유명인의 영향력은 웬만한 중소 언론 매체의 영향력을 능가한다. 지식 편집의 수단을 쥐고 있는 자에게 권력이 쏠리는 시대가 된 것이다.
정보가 부족한 세상이 아니다. 정보는 넘쳐난다. 정보와 정보를 엮어 어떠한 지식을 편집해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 세상이다. ~ 오늘날의 지식인은 정보와 정보의 관계를 '잘 엮어내는 사람'이다. 천재는 정보와 정보의 관계를 '남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엮어내는 사람'이다.
세상에는 '죽어라 노력하는 사람'이 정말 많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실패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노력=성공'과는 또 다른 방식의 성공 내러티브가 가능해야 선진국이다.
천재의 생각은 날아다닌다. 그러나 그 날아다니는 생각을 현실에서 구체화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김정주(넥슨 대표)는 자신의 날아다니는 생각을 잡아내 구체화했다. 바로 그것이 그의 특별함이다.
인간의 의식은 사용하는 도구로 매개된다. 하루에 세 번 숟가락으로 '뜨고' 젓가락으로 '집는' 사람과, 포크로 '찌르고' 나이프로 '자르는' 사람의 의식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서양인이 동양인에 비해 훨씬 공격적인 이유다.
사람들은 남들에게 폼 나 보이고 싶을 때 성장한다.
같은 이야기도 콘텍스트(context, 맥락)가 바뀌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맥락에 따라 다르게 편집된다는 말이다. 해석학의 본질은 '에디톨로지'다.
자기 텍스트를 써야 제대로 학문을 하는 거다.
김용옥의 크로스 텍스트와 이어령의 하이퍼텍스트, 이 둘의 공통점은 바로 자기 이야기를 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김용옥은 고전 텍스트의 권위라는 프리미엄을 포기하지 않는다. 여전히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의 교차적 해석학에 머물고 있다. 이어령은 다르다. 텍스트의 끝없는 해체와 재구성이라는 모험을 시도한다. 어떻게든 자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이어령의 창조적 사유는 '선택과 집중'이 아닌 '선택과 결합'에서 나온다.
'노트'와 '카드(공부 요약 카드 같은)', 이 둘 사이에는 아주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편집 가능성editability'이다. 카드는 자기 필요에 따라 다양한 편집이 가능한 반면, 노트는 편집이 불가능하다.
자기 생각이다. 독일 학생들은 모은 카드를 자신의 생각에 따라 다시 편집한다. 이때 정리는 그저 알파벳순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설정한 '내적 일관성'을 가지고 카드를 편집하는 것이다. 이렇게 편집된 카드가 바로 자신의 이론이 된다.
'실력이 있다'는 것은 편집할 수 있는 자료가 많다는 뜻이다.
'기업'도 지식이다. 기업의 각 세부 조직은 시장에 대응하는 경영자의 지식이 반영된 결과다. 조직 개편은 그 지식의 재구조화다. 같은 분야의 기업이라도 그 기업의 조직도를 보면 경영자가 시장을 파악하는 지식이 한눈에 들어온다.
네트워크적 지식의 탄생. 폭소노미
폭소노미folksonomy는 'folk', 'order', 'nomous'의 합성어로 '사람들에 의한 분류법'이란 뜻이다. 소수 전문가들에 의한 분류법을 뜻하는 '탁소노미Taxonomy'에 빗댄 표현이다.
새로운 지식권력은 편집 가능성에서 나온다.
처리 가능한 데이터베이스가 크면 클수록, 편집의 범위는 넓어진다. 이제까지 전혀 관계없어 보였던 정보와 정보들 간의 새로운 연관 관계가 발견된다. '검색엔진'이 '발견엔진'으로 승화하는 순간이다.
미국 만화와는 질적으로 다른 정서적 경험과 몰입을 가능케 하는 화면 편집 방식을 통해 일본 망가는 세계 만화 시장의 주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몽타주...각각의 부분이 합쳐지면 부분의 특징은 사라지고, 전체로서의 전혀 다른 형태가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이 같은 몽타주 기법이 작동할 수 있는 이유는 '완결성의 법칙 law of closure'이라는 게슈탈트 심리학적 원리 때문이다.
몽타주 기법은 불연속적인 정보, 서로 모순되거나 부자연스러운 정보를 의도적으로 제시해서 관객의 적극적 해석을 유도하는 상호작용적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모든 감각적 경험은 '공감각 synesthesia'적이다.
○ 관점과 장소의 에디톨로지
인문학은 나와 다른 시선에 대한 관용과 이해를 전제로 한다. 세상을 보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다양한 관점을 인정하는 일이다. 잡스가 강조하는 인문학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방식으로 기술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주체와 객체의 인식론적 통찰이 의사소통의 문제로 연결되는 이유는 '객관성이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객관적 관점이란 각기 다른 인식의 주체들이 '같은 방식으로 보기 joint-attention'로 서로 약속해야 가능하다. 다시 말해 객관성이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합의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인문학에서는 객관성이란 단어를 '상호주관성 intersubjectivity'으로 대체한다. 상호주관성의 시대에는 각 주체들 간의 소통이 중요하다. 그래야 서로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 혹은 상호주관적 시점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공간 편집에 따라 인간 심리는 달라진다!
천장의 높이만 조금 더 높여도 창조적이 된다. 미네소타 대학의 마이어스-레비 교수는 천장 높이를 30센티미터 높일 때마다 사람들의 문제 해결 능력에 변화가 생기는 것을 발견했다. 공간의 형태에 따라 생각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천장이 높고, 넓은 공간에서는 사람들의 관점이 거시적이 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잘 나온다. 반면 천장이 낮고, 좁은 공간에서는 사물을 꼼꼼하게 바라보게 되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경향을 보인다.
몰입하려면 어린애들처럼 혼이 쏙 빠지게 즐겨야 한다.
오프사이드 규칙은 축구가 공간 편집 놀이임을 분명히 한다.
계층적 분류 체계와는 달리, 네트워크적 지식은 각 정보들의 관계가 고정적이지 않다. 유동적이며 변화무쌍하다. 맥락에 따라 관계가 매번 달라진다.
○ 마음과 심리학의 에디톨로지
의미는 스스로 만들어낼 때만 의미 있다. 남이 만들어주는 의미는 전혀 의미 없다. 진리를 계몽하던 시대는 지났다. 듣는 이로 하여금 '주체적 편집의 기회'를 제공해야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
천재의 문화,사회적 맥락이 따로 있다.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갖고 태어나도,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 문화적 필요가 형성돼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포스트모더니티의 핵심을 한병철 교수는 '피로사회'라고 규정한다. 근대 후기의 성과 사회는 각 개인을 끊임없는 자기 착취의 나르시스적 장애로 몰아넣는다. 타인에 의한 착취가 아니라 '자발적 자기 착취'다.
'잘못된 정보 효과 misinformation effect'. 자동사 사고 화면을 보여주고, 한 그룹에게는 "차가 부딪혔을 때 속도가 어느 정도였나?" 라고 물어본다. 그리고 다른 그룹에게는 "차가 '쾅' 하고 부딪혔을 때 속도가 어느 정도였나?" 라고 물어본다. '쾅'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사고 낸 차의 속도를 훨씬 빠르게 추정했다. 사건에 대한 정보나 설명이 사건에 대한 기억 자체를 왜곡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선입견에 의해 기억이 왜곡되는 경우는 우리 일상에서 흔히 일어난다.
추상화야말로 인간의 가장 창조적인 능력이다. 인간의 생각이 대상의 모방에 그치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세계를 편집해낼 수 있는 것은 추상화 능력 덕분이다.
기억 왜곡은 추상적, 개념적 사고를 가능케 하는 '기억 편집'의 또 다른 측면이다. 기억 왜곡이 있기 때문에 추상적 사고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기억 편집을 통해 인간은 사물을 선택적으로 기억한다. 선택적 기억을 통한 추상화와 개념화야말로 인간 문화의 본질이다.
해체는 편집의 조건이다. '편집의 단위'를 뽑아내는 해체가 있어야 편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 이야기가 가능 하려면 사용 가능한 데이터가 풍부해야 한다. 그리고 그 데이터를 자유롭게 연결할 때 얻어지는 메타언어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공부다.
커닝 페이퍼를 준비하다 보면, 어느새 그 내용을 다 숙지하게 된다. 정작 커닝 페이퍼를 사용할 필요는 없어진다. 이와 마찬가지다. 데이터베이스를 만들며 나름의 개념 체계를 만들다 보면, 어느새 전혀 다른 차원의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저자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며 읽기 바쁜 사람에겐 목차든, 찾아보기든 아무 필요 없다. 그런 식의 독서법이라면 매번 저자의 이론을 따라가는 데 급급한 수준을 죽을 때까지 뛰어넘지 못한다. 창조적인 '내 생각'이 절대 나오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목차와 찾아보기는 주체적 독서를 하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주체적 책 읽기'란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목적이 분명함을 뜻한다.
독서는 내가 가진 개념과 저자의 개념이 편집되는 에디톨로지 과정이다. 그래야만 저자의 생각이 내 생각의 일부가 된다.
○ 에필로그
뭔가 새로운 것을 손에 쥐려면, 지금 쥐고 있는 것을 놓아야 한다. 지금 손에 있는 것 꽉 쥔 채 새로운 것까지 손에 쥐려니, 맘이 항상 그렇게 불안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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