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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싶은 말들

[온라인새벽기도] 내 앞으로 계산하라

by manga0713 2020. 7. 27.





본문말씀 : 빌레몬서 1장 18-19절

18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19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내 앞으로 계산하라 (빌레몬서 1장 18-19절)

< 좋은 후원자를 가진 복 >

 미국에서 신대원을 다닐 때 미국인 학생들을 보면 가끔 연민이 생겼다. 미국에서는 만 18세가 넘으면 부모로부터 독립하니까 대학에 진학하면 대부분 집을 떠나 기숙사에 들어간다. 그리고 의식주와 학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허드렛일도 한다. 그런 자립적인 태도가 좋은 것이지만 한국 문화에 젖은 저에게는 안쓰럽게 보였다. 고학으로 자기 길을 개척하는 것도 좋지만 부모의 든든한 후원이 있는 것도 좋다.

 미국 신대원 시절에 비교적 가까이 지낸 5명의 친구가 있었다. 그 중에 짐 턴불(Jim Turnbull)은 바로 옆방 친구로서 필자가 어려울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90년에 600불을 주고 하드디스크가 없는 랩탑 컴퓨터를 샀는데 원했던 한글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없었다. 컴퓨터 플라피 디스크 용량이 한글 프로그램의 용량보다 작았기 때문이다. 어려운 유학시절에 거금 600불을 주고 산 제품을 쓰지 못하게 되자 마음이 크게 상했다.

 그때 짐이 다가와 컴퓨터를 산 날 밤부터 자신의 고성능 컴퓨터로 한글 프로그램의 용량을 압축시켰다. 그 일은 컴퓨터 도사였던 그에게도 쉽지 않았다. 그가 전혀 한글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때 필자와 함께 한글 구조를 익히면서 며칠간 고생한 끝에 한글 프로그램 용량을 플라피 디스크 하나로 압축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디스크를 넣고 필자의 컴퓨터에 한글 프로그램이 뜨는 것을 본 순간 너무 고마워서 목이 메일 정도였다.

 당시에 그를 통해 부모의 넉넉한 후원을 받고 자란 자녀에 대한 인식이 크게 변했다. 그는 아버지가 코카콜라 회사의 부회장이어서 잘 살았지만 교만하지 않고 다정다감해서 그를 볼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부모의 든든한 후원이 인생에서 마이너스만은 아니구나.” 넉넉한 부모 밑에서 고생을 모르고 자라면 사람에 따라 나약해지거나 남을 무시하는 태도가 생길 수도 있지만 반대로 남을 따뜻하게 감싸 안는 태도도 배양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사람이 스스로 힘써 자기 지경을 넓혀 나가는 것도 좋지만 든든한 부모의 후원으로 마음의 풍요를 키우는 것도 좋다. 복된 삶을 사는 데 든든한 후원자는 큰 힘이 된다. 지금 그런 후원자가 없다고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이 가장 든든한 후원주이시기 때문이다. 든든한 후원주이신 하나님을 꼭 붙들면 때가 되어 하나님이 든든한 후원자도 만나게 해 주신다. 겸손한 믿음을 통해 얻는 든든한 후원자와 든든한 배경은 인생의 위대한 자산이다.

 빌레몬서에는 나오는 오네시모는 도망친 노예였지만 바울을 만나 변화된 후 전승에 의하면 나중에 에베소 교회의 주교가 된다. 사도 바울이 배경이 되어 줌으로 노예가 주교가 된 것이다. 현재 내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시작은 좋지 않았어도 끝은 좋게 되는 놀라운 인생 승진을 기대하며 살라. 비천한 상황에 처해도 낙심하지 말라. 나의 신실한 믿음과 섬김으로 언젠가 바울처럼 좋은 후원자를 만나면 극적인 인생 반전의 역사가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 과정과 질서를 존중하라 >

 어느 날 사도 바울이 나이가 많은 상태에서 예수님을 전파하다가 로마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감옥에서 낳은 영적인 아들 오네시모를 형제처럼 받아들여 달라고 빌레몬에게 부탁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자기를 섬기며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원했지만 먼저 오네시모의 주인인 빌레몬의 자발적인 동의를 구했다(14절). 그처럼 아무리 좋은 일도 강요해서 하거나 불의하게 하지 말라. 절차와 과정과 질서와 체계도 중요하다.

 왜 공산국가가 한때 세계의 거의 절반에 달했다가 한 세기도 되지 않아 거의 사라졌는가? 지금 남은 공산국가들도 공산적인 사회 시스템이 급격히 퇴조되고 있다. 왜 그런가? 정의를 내세우고 이루는 과정에서 불의와 폭력도 용납하기 때문이다. 결과적 정의만큼 절차적 정의도 중요하다. 정의로운 결과를 만들겠다고 과정에서 불의를 동원하면 안 된다. 인간을 위한 사회 혁명을 한다면서 바탕에 인간미가 없다면 그 혁명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정의를 추구하는데 정이 없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정은 있는데 정의가 없다. 그 두 가지가 다 삼가야 할 태도다. 바울은 정을 내세워 오네시모에게 자유를 주려고 하면서도 빌레몬이 자발적으로 자기 뜻을 따르게 하려고 결정 당사자인 빌레몬의 허락을 겸손하게 구함으로 절차적인 정의도 지키려고 했다. 그처럼 절차와 과정과 질서를 중시하는 겸손한 태도가 리더에게도 있어야 하고 팔로워에게도 있어야 한다.

 사랑이 없는 공의는 불완전한 공의이고 공의가 없는 사랑은 불완전한 사랑이다. 정과 정의를 겸비하라. 착한 삶이 의로운 삶을 앞설 수는 없다. 의를 바탕으로 착하게 살라. 아무 것이나 무조건 열린 마음으로 따르고 신봉하지 말라. 변화도 필요하지만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것도 필요하다. 무조건 옛날 방식을 고수하면 꼰대가 되지만 꼭 지켜야 할 것을 힘써 지키면 꼰대가 되기보다 닮고 싶은 어르신이 된다. 질서와 과정도 존중하라. 그런 존중심이 있었기에 바울은 빌레몬에게 마음대로 명령하지 않고 겸손히 부탁했다.

<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라 >

 바울은 빌레몬에게 부탁할 때 그의 마음을 열려고 ‘오네시모가 도망친 것’을 ‘잠시 떠나게 된 것’이라고 죄를 희석시켜 묘사했고 오네시모가 떠나게 된 것이 오히려 영원히 빌레몬 곁에 두려는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역설적으로 말했다(15절). 바울의 편지를 받고 빌레몬은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면서 그 권고를 넉넉히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처럼 나쁜 상황도 내게 있어야 했기에 하나님의 선한 섭리로 이뤄졌다고 생각하고 감사하며 그 상황을 받아들이라. 고통을 잘 승화시키면 깨달음도 깊어지고 앞날의 축복도 더해지고 천국 상급도 커진다.

 자녀로 인해 속상하면 그때는 고통스럽지만 그런 체험을 통해 비로소 내가 과거에 부모의 속을 얼마나 상하게 했는지 그리고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새삼 깨닫는다. 그런 깨달음을 통해 더 철든 인생을 만들려고 하나님은 종종 고통도 허락하신다. 또한 자녀로 인한 고통의 체험을 통해 내가 비뚤어진 길로 갔을 때 하나님도 얼마나 아파하셨을까를 생각하며 힘들어도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사람이 진짜 성도다.

 살다 보면 어떤 사람 때문에 내 인생길이 막히기도 한다. 그때도 믿음과 감사를 잃지 않으면 나중에 보면 그 상황이 더욱 잘 된 결과를 낳는다. 어느 날 여러 사람이 섬 여행을 떠났는데 동행자 중 한 명이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오지 않아 나머지 일행도 다 배를 타지 못할 때가 있다. 그때 주민등록증을 가져오지 않은 사람 때문에 속상해하기보다 그것도 감사하며 다른 지역으로 여행 일정을 바꿔 진행하면 의외로 더 좋은 여행을 즐길 때도 많다.

 남 때문에 내 길이 막혀도 그를 욕하거나 성내지 않고 감사하면 신기하게 내 자녀가 잘 되든지 혹은 다른 선한 역사가 이뤄질 때가 많다. 나중에 보면 길이 막힌 것이 하나님의 선한 섭리로 이뤄졌음을 느낀다. 오네시모가 도망친 것도 빌레몬에게는 처음에는 속상한 일이었겠지만 바울은 그 일도 하나님의 선한 섭리로 이뤄진 일이라고 해서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잘 받아들이도록 거룩한 사전 정지 작업을 했다. 얼마나 지혜로운 사도인가?

< 내 앞으로 계산하라 >

 바울은 빌레몬에게 좋은 권고를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오메시모를 위해 재정적인 책임도 기꺼이 지려고 했다(18-19절). 그처럼 헌신의 모범을 보여야 인물 리더가 된다. 계산적으로 희생을 회피하지 말고 “내 앞으로 계산하라.”라는 자세를 가지고 대가를 치르려고 하라. 그래야 누군가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계산이 너무 밝은 것은 좋지 않다. 계산적인 면에서는 조금 어수룩한 것이 낫다. 때로는 어수룩한 사람이 더 매력적이다. 선교를 잘하는 사람은 계산적인 사람이 아니라 대개 계산에 어수룩한 사람이다.

 이번에 몇 군데 교회 보수 공사를 하니까 교회가 조금 깔끔해졌다. 몇 달치 선교비만 절약하면 오래 전에 공사할 수 있었지만 선교를 먼저 했기에 공사는 계속 미뤄졌었다. 그리고 이번에 공사하면서 그 사실을 특별히 광고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성도가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난 세월 동안 우리의 모습이 초라해지는 상황도 감수하면서 교단으로 선교비와 후원비를 보냈다. 계산을 모르는 어수룩한 행동이다.

 200페이지가 넘는 <월새기(월간새벽기도)> 한 권에 천 원 받는 것을 만 6년째 유지하고 있다. 앞으로 물가가 올라도 계속 천 원이란 상징적인 가격으로 <월새기>를 공급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수시로 기도하고 있다. 그렇게 세상 계산과 동떨어진 상태로 어수룩하게 살면 금방 패가망신을 할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수룩하게 사는 사람의 필요를 또 다른 어수룩한 사람을 통해 채워주실 때가 많다.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과 헌신의 순환인가? 하나님은 계산적이지 않은 어수룩한 사람의 순수한 헌신을 다 기억하고 계신다.

 1993년부터 필자는 일체감과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거의 매년 미국 C&MA 한인 총회에 참석했다. 그러면 한국에서 와서 고맙다고 필자 부부의 참석 경비를 면제해 주었다. 그것이 늘 고마워서 언젠가는 필자도 갚겠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2012년 한국에서 제주 총회가 개최될 때 미국에서 온 목사들을 한국 지역회에서 섬겼는데 약 150명의 3박 4일의 숙식비를 다 부담했기에 재정이 꽤 많이 들었다. 그때 필자도 헌신에 동참하려고 집을 전세에서 월세로 옮겼는데 아내도 안델센의 어리석은 농부처럼 순순히 필자의 결정을 따라 주었다.

 남편에 대한 깊은 신뢰로 그렇게 따라 준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돈 문제에 대한 의식이 없고 계산에 어수룩해서 그냥 따라 준 것이었다. 그렇게 총회를 섬기려고 이사까지 했는데 8년이 지난 지금까지 동료 목사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른다. 그 얘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하나님은 알고 그 후 지금까지 월세를 살면서도 전혀 부족함이 없이 살게 하셨고 때로는 집을 소유한 사람보다 더 헌신하게 하셨다. 또한 시급한 필요가 있을 때는 신비하게 때에 맞춰 후원자의 손길을 통해 하늘의 만나를 공급하셨다.

 사람은 계산을 잘 못해도 하나님의 다 계산해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 인물의 꿈을 이루려면 바울처럼 “내 앞으로 계산하라.”라고 하는 담대한 고백을 앞세워 살라. 그렇다고 무작정 “목사님을 따라 해서 나도 기적적인 은혜를 체험하리라.”라고 하지 말라. 남의 간증을 듣고서 기적적인 축복을 기대하고 남을 따라 기도하고 헌신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계산적인 태도다. 그저 순수하게 “내 앞으로 계산하라.”라고 하는 헌신적인 믿음의 고백으로 살면 하나님은 그 헌신을 기억하고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실 것이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