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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싶은 말들

[온라인새벽기도] 서로 종노릇하라

by manga0713 2021. 6. 24.

[ 루벤스 : 향유를 바르는 마리아 ]

 

 

본문말씀 : 갈라디아서 5장 13-15절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 자유를 남용하지 말라 >

 갈라디아서는 2부로 나뉜다. 전반부 1-4장의 교리편과 후반부 5-6장의 실천편이다. 교리편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강조한 후 실천편에 들어서 사도 바울이 제일 먼저 권고한 것이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말씀이었다(갈 5:1). 그런데 본문에서는 종노릇 하라고 했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가? 본문에서는 단순히 종노릇 하라고 하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라고 했다. 자유를 누리는 삶 중 가장 고귀한 삶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종이 되기를 자처하는 삶이다.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할 성도가 종노릇을 해야 하는 이유는 자유의 남용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주어진 자유를 잘 쓰지 못해 부작용이 생기면 그 자유는 더 이상 복된 자유가 아니다. 자유를 얻은 후 그 자유를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더 높은 목표를 세우라. 그런 목표를 향한 결단과 훈련이 없는 자유는 오히려 인생의 장애가 된다.

 러시아가 왜 공산화되었는가? 주어진 자유를 잘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는 무서운 독재정치를 펼쳤고 극도의 사치를 부리며 시민들의 피를 짜냈다. 그 왕조가 1917년에 무너졌다. 그때 자유를 얻은 러시아 시민들은 어떻게 살아야할지 대안을 내야 했는데 대안을 내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다가 황제의 독재보다 더 무서운 공산주의 독재에 처하게 되었다.

 죄로부터 얻은 자유를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목표를 세우라. 그 목표가 분명하지 않으면 자유는 오히려 영혼과 사회를 급속히 망칠 수 있기에 주어진 자유로 인해 방종에 빠지지 않도록 사랑으로 종노릇 하라. 성도는 누구의 종이 되어야 하는가? 영원한 자유를 주신 주님의 종이다. 성도라면 늘 이런 진실한 고백을 가지고 살라. “주님! 주님은 저의 주인이십니다.”

< 서로 종노릇하라 >

 구약 출애굽기 21장 1-6절을 보면 종이 주인을 위해 6년간 일한 후 7년째가 되면 자유를 얻는데 주인이 너무 좋다고 자유를 포기하는 종도 있었다. 그러면 주인은 재판장으로부터 공증 받은 후 그 종을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는다. 그러면 그날부터 그 종은 주인의 영원한 종이 되고 주인도 그 종을 예전의 종처럼 부리지 않고 자기 아들처럼 대한다. 이런 종을 자유종이라고 한다.

 부부는 서로에게 일종의 자유종이다. 사랑하기에 서로를 섬긴다면 서로에게 주어진 멍에는 무겁지 않다. 그처럼 서로 종노릇하며 섬겨주면 인간관계가 풍요롭게 된다. 인간관계가 파괴되는 이유는 교제의 근본 동기가 잘못되어 서로 종노릇하기보다 서로 주인노릇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서로 종노릇하지 않고 잡아먹으려고 지나치게 경쟁하면 다 망한다(14-15절).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예수님은 친히 종이 되어 종이란 비천한 단어를 영광스러운 단어로 만드셨다. 그렇다면 성도가 종이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인생을 평가할 때 “얼마나 많은 종을 거느리고 살았느냐?”보다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종노릇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 바울은 율법주의 및 다른 복음을 얘기하다가 사랑 얘기를 하는가? 율법주의자는 영성을 자랑하며 남을 비판하다가 사랑을 잃어버릴 때가 많기 때문이다. 왜 인간사회에 비판과 정죄가 난무하게 되는가? 인간의 교만과 율법주의 때문이고 결국 사랑의 결핍 때문이다. 율법주의를 극복하려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사랑이다.

 시계 안의 성급한 초침, 차분한 분침, 느긋한 시침은 멋진 조화를 이루며 제 몫을 다한다. 그처럼 내 주변인이 내 생각이나 스타일과 도저히 맞지 않아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를 감싸줄 때 가정과 교회와 사회는 가장 복된 모습을 나타낸다. 사람은 공존하는 존재 겸 동역하는 존재다. 공존은 삶의 기초이고 동역은 삶의 기둥이다. 단순한 공존을 위해서는 법이 필요하지만 고차원적인 동역을 위해서는 법 이상의 도덕과 양심과 사랑이 필요하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