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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싶은 말들

[온라인새벽기도] 십일조 생활의 복

by manga0713 2022. 3. 14.

[ 프랑수아조세프 나베 : 가난한 과부의 헌금 ]

 

 

본문말씀 : 민수기 18장 21-29절

 

21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22 이 후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회막에 가까이 하지 말 것이라 죄값으로 죽을까 하노라 23 그러나 레위인은 회막에서 봉사하며 자기들의 죄를 담당할 것이요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기업이 없을 것이니 이는 너희 대대에 영원한 율례라 24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주었으므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 2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6 너는 레위인에게 말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받아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때에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 물질에 매이지 말라 >

 창세기 14장을 보면 그돌라오멜을 중심으로 한 북쪽의 4개 강대국 동맹이 자기들의 지배권에서 벗어나려던 남쪽의 5개 소국 동맹을 상대로 싯딤 골짜기에서 전쟁을 벌였다. 그 전쟁에서 남쪽 동맹이 패배하면서 소돔에 살던 롯이 붙잡혔다. 그 소식이 아브람에게 전해지자 아브람은 즉시 318명의 사병을 데리고 북쪽 동맹군을 단까지 추격했다. 그리고 밤의 기습 작전으로 전쟁에서 이겨 롯과 그의 가족과 친척과 재물까지 다 되찾았다.

 아브람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람을 맞이하고 축복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아브람에게 복을 주소서.” 그 축복을 받고 아브람은 그에게 얻은 것의 십일조를 바쳤다. 그 십일조는 자신의 승리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깨닫고 감사하는 행동 고백이었다. 결국 아브람의 십일조는 그의 믿음과 사람됨을 잘 보여준다. 그에게는 절망을 낳는 인색함이 없었다. 인색은 인생을 가장 망치는 것 중 하나다. 인색하면 인물 되기 힘들다.

 아브람은 십일조를 드릴 줄도 알았지만 나누고 베풀 줄도 알았다. 그때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자기 백성들만 돌려주고 전리품은 아브람이 차지하라고 했다. 그러자 아브람이 말했다. “당신 때문에 재벌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소. 당신 것은 작은 것 하나도 가지지 않겠소.” 그래서 자신과 동맹한 사람들의 몫만 떼어놓고 나머지는 다 소돔 왕에게 돌려주었다. 아브람은 물질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는 당대의 재벌이었지만 나눌 줄 아는 복된 재벌이었고 드릴 줄 아는 거룩한 재벌이었다.

 아브람처럼 남의 것을 빼앗아 부자가 되었다는 소리를 듣지 말라. 드리고 나누고 베풀며 살아도 아브람은 오히려 더 재벌이 되었다. 그런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았기에 당대의 재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믿음의 조상으로서 영적인 재벌까지 되었다. 십일조 생활로 당당하고 호방하고 넉넉하게 사는 참된 자유인으로서 물질 문제를 잘 극복하도록 훈련되라. 물질에 집착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집중하지 않는 표시다. 십일조 생활로 하나님께 집중하면 물질 유무와 상관없이 참된 자유와 평안을 누릴 수 있다.

 오래 전 미국의 한 청년 백만장자가 사업의 부도로 큰 빚을 졌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참된 믿음이 생겼다. 그러면서 두 가지가 변화되었다. 즉 꾸준한 교회 출석과 신실한 십일조 생활이 틀이 되었다. 그의 모습을 보고 지인이 말했다. “빚이 그렇게 많은데도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덕이 됩니까?” 그가 대답했다. “저는 헌금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빚을 갚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의 첫 번째 채권자이십니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하나님 앞에 더 많이 드리길 원합니다.”

 그가 나중에 멋지게 재기한 후 말했다. “십일조 생활과 하나님 우선순위의 삶을 다짐하고 실천하자 실패 후에 승리가 따라왔습니다.” 그의 승리가 얼마든지 나의 승리가 될 수 있다. 십일조 생활은 단순한 선행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신앙 고백이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온전히 믿지 않으면 꾸준히 십일조 생활은 쉽지 않다. 반대로 믿음이 부족해도 순종적이고 책임적인 성품을 따라 꾸준히 십일조 생활을 하면 점차 믿음도 커지고 인성 훈련도 되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하는 복도 따라올 것이다.

< 십일조 계명의 실천 원리 >

 본문에는 하나님이 주신 십일조 계명이 나온다. 본문이 교훈하는 십일조 계명의 구체적인 실천 원리는 무엇인가?

1.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드리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일조 드리게 하신 핵심 목적은 레위인이 회막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에 대한 보상으로서 그들의 생계유지를 위한 것이었다(21절). 그처럼 레위인에게 십일조를 주어 회막 봉사를 전적으로 감당하도록 했기에 만약 회막 봉사에 소홀히 하면 마땅한 죗값을 받아야 했다. 그만큼 회막 봉사에 책임적으로 임해야 했고 그 책임이 소홀해지지 않게 생계 염려가 없도록 십일조를 기업으로 받게 했고 대신 땅을 기업으로 받는 일은 없게 하셨다(22절).

2. 레위인의 십일조를 드리라

 이스라엘 자손이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주면 레위인은 그 십일조 중에서 다시 십일조를 떼어 여호와께 거제로 드려야 했다(25-26절). 즉 레위인이 드린 십일조는 레위인 중에서 아론의 후손인 제사장 몫이 되었다. 결국 전체 이스라엘 백성의 소산물이 100톤이라면 전체 레위인에게는 10톤이 돌려졌고 전체 레위인 중 제사장 가문인 아론 가문에게는 1톤이 돌려졌다. 또한 제사장에게 드릴 때는 양적으로 소산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으로 의무를 다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가장 품질이 좋은 소산으로 십일조를 드리라고 했다(28-29절).

3. 모든 것의 십일조를 드리라

 십일조 생활은 물질의 십일조 생활만 의미하지 않는다. 큰 의미에서 물질뿐만 아니라 모든 것의 십일조를 하나님의 것으로 여기고 드리라. 시간의 십일조도 하나님의 것으로 여기라. 고난에는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삼아서 하나님이 그 고난을 통해 최소한 십일조 이상을 쓸어 가시는 교훈적 이유도 있다. 마찬가지로 고난의 시간은 시간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지 못해서 주어지는 경우가 많기에 결국 시간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교훈적 메시지도 준다.

< 십일조 생활의 복 >

 기본적으로 나의 생명을 비롯해 나의 소유와 시간은 모두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이다. 그것의 십일조를 하나님의 뜻과 사역과 사역자를 위해 쓰도록 드리라는 것이 십일조의 원리다. 십일조 생활을 외면하면 최소한 그만큼의 물질과 시간이 다른 힘든 상황이 생기면서 허무하게 사라진다. 반면에 십일조 생활에 힘쓰면 하나님이 받으신 물질과 시간 이상의 복을 넘치게 주신다.

 말라기 3장을 보면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 건축 후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지 않고 믿음이 나태해지자 하나님은 “내게로 돌아오라.”라고 하셨다. 백성들이 물었다.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갑니까?” 그때 하나님은 “말씀을 가까이하라. 간절히 기도하라.”라고 하시지 않고 맥락에 안 맞는 것 같은 말씀을 하셨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말 3:8).”

 어떤 사람은 궁금해 한다. “왜 하나님이 회개하라고 하시면서 돈 얘기를 하시지?” 그러나 사람의 믿음이나 성품과 관련해서 돈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십일조와 감사헌금과 선교헌금을 외면하면 하나님은 그런 모습을 회개가 없는 모습으로 보시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모습으로 보신다. 돈 문제를 잘 다루지 않으면 사탄에게 당한다. 돈은 가장 무서운 우상이 될 수 있다. 반면에 잘 사용된 돈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고 인생을 복되고 가치 있게 만드는 위대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십일조 생활은 생각 이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대체로 목사들은 돈과 관련된 설교를 잘 못한다. 많이 헌금시키기 위해 돈 설교를 한다고 오해하는 성도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오해에는 일부 부흥사들의 잘못된 행태도 큰 원인이다. 과거에 그런 부흥사는 부흥회 마지막 날에 말한다. “1억 원 헌금할 사람 손들어봐. 한 사람도 없어? 오천만 원 헌금 할 사람 손들어봐.” 그렇게 반말로 헌금을 약정시키면 많은 사람들이 시험에 들었다.

 요새는 목사 수준이 옛날보다 훨씬 높아져서 거액을 강요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약정시키는 설교는 거의 사라졌다. 그처럼 목사들이 십일조 문제에 관해 제자리를 찾으면 성도들도 자발적으로 좀 더 책임적인 모습으로 십일조 문제에 관해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점차 십일조 생활을 외면하면서 십일조 설교를 부담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심지어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이니까 신약 성도에게는 필요 없다는 이단 교주의 주장에 미혹되기도 한다.

 이단 교주가 십일조를 구약 시대 율법이라면서 십일조를 부정하는 주장을 하면 신령하게 보이지만 그의 전략은 따로 있다. 십일조를 하지 말라면서 영혼을 사로잡은 후 거하게 집과 재산과 노동력을 탈취하는 전략이다. 그런 전략에 미혹되지 말고 십일조를 구약 율법으로만 보지 말라. 신실한 십일조 생활은 참된 회개와 관련이 깊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에 대한 성도의 책임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하나님 앞에 책임적인 존재로 살라는 십일조의 계명을 단순히 구약 율법으로 여기며 경시하지 말라.

 십일조의 원리에 대한 오해를 버리라.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부지런히 일해서 얻는 열 개 중 하나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십일조인 줄 알지만 사실상 열개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다. 결국 십일조의 참된 의미는 내가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10분의 9를 내게 주시는 것이다. 그 의미를 이해하고 행하는 십일조 생활은 놀라운 복의 씨앗이 된다. 왜 신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들이 사랑하는 자식이 굶어 죽어도 종자를 먹이지 않았는가? 이듬해 씨를 뿌려야 했기 때문이다.

 씨앗을 뿌려서 잘 가꾸면 100배의 수확을 할 수 있지만 그 씨앗을 자기가 먹어치우면 나중에 거둘 것이 없어진다. 십일조의 씨앗을 혼자 먹어치우지 말라. 자녀가 복되게 살기를 원하면 십일조 생활을 힘써 가르치라. 용돈에서도 십일조를 구별하는 법을 가르쳐서 “네 인생은 하나님 앞에 구별된 인생이야.”라는 인식을 분명히 심어주면 자녀는 인색함이 없는 복된 성품도 얻고 때가 되면 가시적인 복도 얻을 것이다. 늘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교회와 일꾼을 위해 책임적으로 헌신해서 기쁨과 보람을 얻고 내일의 넘치는 복을 예비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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