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독일 베를린의 한 호텔에 투숙한 한 청년이 배고픔과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먼저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는데 너무 아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목을 매려고 허리 띠를 뽑아 목욕탕 고리에 걸고 의자 위에 올라가 목을 매단 후 의자를 발로 찼습니다. 그런데 혁대가 낡아서 끊어지는 바람에 그냥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갑자기 그 청년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하마터면, 죽을 뻔 했네, 천만 다행이야." 그 순간 그 청년의 생각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죽음 직전에서 살아난 것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보니까 이전과는 달리 모든 것이 희망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결심했습니다. "그래, 이렇게 된바에야 한번 열심히 살아보자."
이 청년이 바로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Arther Rubinstein 입니다. 쇼팽의 최고 권위자요, 위대한 쇼팽의 전달자, 쇼팽의 교과서, 위대한 인품의 소유자라고 불리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Chopin Nocturne Op.9 No.2]
역시나 루빈스타인은 천재로 태어났습니다. 1887년 폴란드의 유태인 가정에서 8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는데요, 절대음감을 가지고 태어나서인지 피아노 레슨을 받는 누나 옆에서 곁눈질로만 배우다가 3세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고 4세때부터 신동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특히, 그는 암보(악보 암기)와 초견에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고 합니다. 한 번 척 보면 걍~ 다 연주하는거죠, 안보고^^
어떤 천재이든지 간에 누구 눈에 띄는냐가 참 중요한데요, 루빈스타인은 브람스의 평생지기로 유명한 독일의 바이올린 연주자 조셉 요하임 Joseph Joachim의 눈에 들었고요, 그가 소개한 칼 하인리히 바트 Heinrich Barth에게 본격적으로 교육과 훈련을 받게 됩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굴곡이 찾아오는 것 같이(이런 것을 보면 인생은 참 공평한 것 같기도 합니다..^^) 루빈스타인에게도 굴곡과 위기가 찾아오는데요, 1905년부터 시작한 미국 연주 여행에서 그는 쓴 맛을 봅니다. 당시의 평론가들의 논평을 보면, 당시 18세의 나이로 낭만적인 격정만으로 폭발적인 연주효과에 신경을 썼던 그에게는 일침이 되었습니다.
"이 젊은이에게는 양념이 필요하다.", "미완성의 대기"
75회에 이르는 연주회를 했어도, 그에 대한 반응은 시큰둥 했습니다. 연주자의 연주회가 성황을 이루고 음반 판매로 이어져야 연주자로서의 삶을 이어갈 수 있을텐데 그렇지 못했던 것이지요. 결국 금전적인 어려움을 겪고, 빚독촉을 받고 뭐 등등 힘든 일들의 연속이었지요. 무엇보다도 천재로서의 자신 스스로가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더욱 어렵지 않았을까요?
결국, 자살을 결심하고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지요. 후에 루빈스타인은 당시를 회상하며 "다시 태어났다. Born Again"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다시 태어남, 다시 시작함은 이렇듯 한 순간의 차이입니다. 자살도 반대로 읽으면 살자가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다시 태어 난 그는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버려야할 것은 과감하게 버렸습니다. 초창기 미국 연주여행 시절에 받은 평가에 대해서 그는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라고 자서전에서 밝힌바 있습니다.
파리로 돌아 간 그는 자신의 연주의 향상을 위하여 약점의 보완, 낭만적인 정열을 유지하며 조화를 강조하고 조잡한 기교 제거 등등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게 됩니다. 특히나 자신에 대한 성찰을 깊고 강렬하게 하였는데요, 이 후의 연주활동에서 그러한 노력의 열매를 볼 수 있게 됩니다.
또한 그의 열정을 엿볼 수 있는 일화로는 당대에 신진으로 치고 올라오는 두 피아니스트가 있었습니다. 바로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이 사람 이름은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와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입니다.
이 두사람은 루빈스타인과 30여년의 나이차가 나지만 살인적인 기교와 폭발적인 에너지로 청중을 사로 잡았는데요 연주자로서 대단한 경쟁자의 출현은 위기가 아니라 할 수 없겠습니다. 그러나 루빈스타인은 끝없는 자기 성찰과 열정으로 다가 온 위기를 자신을 거듭나게 하는 자양분으로 삼습니다.
1887년에 태어나 95세를 향유하면서 90세까지 현역활동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인 것이지요.
루빈스타인이 가장 인간적인 거장으로 칭송받는 이유중 하나로 그의 베품을 즐겨하는 삶에 있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였기 때문에 최고의 개런티를 받을 수 있었고 당연히 부를 누릴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개런티만큼 풍족한 삶을 살지 못했는데요, 바로 베품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개런티를 아낌없이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전해집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그가 이스라엘의 음악발전에 이바지하고 이스라엘에서 열린 그의 연주회 개런티를 아낌없이 기부한 그의 업적을 기리는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콩쿨'을 개최하기도 하였습니다.
역시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맏습니다.
저녁시간, YouTube에서 루빈스타인 검색해 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연주곡들이 올라와 있습니다. 자녀와 함께 들으시면서 루빈스타인의 역경을 이긴 인생에 대해서 나눠 보시기 바랍니다. ^^
특히, 그는 암보(악보 암기)와 초견에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고 합니다. 한 번 척 보면 걍~ 다 연주하는거죠, 안보고^^
어떤 천재이든지 간에 누구 눈에 띄는냐가 참 중요한데요, 루빈스타인은 브람스의 평생지기로 유명한 독일의 바이올린 연주자 조셉 요하임 Joseph Joachim의 눈에 들었고요, 그가 소개한 칼 하인리히 바트 Heinrich Barth에게 본격적으로 교육과 훈련을 받게 됩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굴곡이 찾아오는 것 같이(이런 것을 보면 인생은 참 공평한 것 같기도 합니다..^^) 루빈스타인에게도 굴곡과 위기가 찾아오는데요, 1905년부터 시작한 미국 연주 여행에서 그는 쓴 맛을 봅니다. 당시의 평론가들의 논평을 보면, 당시 18세의 나이로 낭만적인 격정만으로 폭발적인 연주효과에 신경을 썼던 그에게는 일침이 되었습니다.
"이 젊은이에게는 양념이 필요하다.", "미완성의 대기"
75회에 이르는 연주회를 했어도, 그에 대한 반응은 시큰둥 했습니다. 연주자의 연주회가 성황을 이루고 음반 판매로 이어져야 연주자로서의 삶을 이어갈 수 있을텐데 그렇지 못했던 것이지요. 결국 금전적인 어려움을 겪고, 빚독촉을 받고 뭐 등등 힘든 일들의 연속이었지요. 무엇보다도 천재로서의 자신 스스로가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더욱 어렵지 않았을까요?
결국, 자살을 결심하고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지요. 후에 루빈스타인은 당시를 회상하며 "다시 태어났다. Born Again"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다시 태어남, 다시 시작함은 이렇듯 한 순간의 차이입니다. 자살도 반대로 읽으면 살자가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다시 태어 난 그는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버려야할 것은 과감하게 버렸습니다. 초창기 미국 연주여행 시절에 받은 평가에 대해서 그는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라고 자서전에서 밝힌바 있습니다.
파리로 돌아 간 그는 자신의 연주의 향상을 위하여 약점의 보완, 낭만적인 정열을 유지하며 조화를 강조하고 조잡한 기교 제거 등등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게 됩니다. 특히나 자신에 대한 성찰을 깊고 강렬하게 하였는데요, 이 후의 연주활동에서 그러한 노력의 열매를 볼 수 있게 됩니다.
또한 그의 열정을 엿볼 수 있는 일화로는 당대에 신진으로 치고 올라오는 두 피아니스트가 있었습니다. 바로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이 사람 이름은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와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입니다.
이 두사람은 루빈스타인과 30여년의 나이차가 나지만 살인적인 기교와 폭발적인 에너지로 청중을 사로 잡았는데요 연주자로서 대단한 경쟁자의 출현은 위기가 아니라 할 수 없겠습니다. 그러나 루빈스타인은 끝없는 자기 성찰과 열정으로 다가 온 위기를 자신을 거듭나게 하는 자양분으로 삼습니다.
1887년에 태어나 95세를 향유하면서 90세까지 현역활동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인 것이지요.
루빈스타인이 가장 인간적인 거장으로 칭송받는 이유중 하나로 그의 베품을 즐겨하는 삶에 있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였기 때문에 최고의 개런티를 받을 수 있었고 당연히 부를 누릴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개런티만큼 풍족한 삶을 살지 못했는데요, 바로 베품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개런티를 아낌없이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전해집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그가 이스라엘의 음악발전에 이바지하고 이스라엘에서 열린 그의 연주회 개런티를 아낌없이 기부한 그의 업적을 기리는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콩쿨'을 개최하기도 하였습니다.
역시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맏습니다.
저녁시간, YouTube에서 루빈스타인 검색해 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연주곡들이 올라와 있습니다. 자녀와 함께 들으시면서 루빈스타인의 역경을 이긴 인생에 대해서 나눠 보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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