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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허지웅] 나의 친애하는 적

by manga0713 2016. 12. 10.

[표지 이미지 출처: 인터넷교보문고]

 

허지웅. 그는 쓴다.

호흡 같은 날들을 뱉어 버리지 않고 그의 숨으로 담고. 그의 숨으로 뿜는 재주가 있나보다.

들이 숨을 바로 뱉지 않는다는 궁금했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 속의 그의 눈빛과 몸짓이 그랬다.

그래서 더욱 궁금했다.

 

'나의 친애하는 ' 보니 쬐끔 같다.

듣고, 보고, 느끼고, 갈기는 쯤은 나도 한다.

그러나 그는 숨을 들이쉬고 깊게 내려 보내고

턱에 차도록 숨을 참고 달려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현상에 대해서, 관계에 대해서, 아픔에 대해서,

쪽팔림에 대해서, 염치에 대해서 숨에 내려간 것이리라.

 

나도 그처럼 영화를 읽어보고 싶다.

 

 

다음은 책의 밑줄 부분이다.

 

 

(그의 문신, "현실주의자가 되자, 하지만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자.") 생각은 내게 소중했다. 내가 만난 많은 어른들은 정확히 그와 반대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겉으로 몽상가처럼 세상에 관한 따뜻하고 근사한 말을 늘어놓되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치의 손해도 용납할 없다는 뜨거움으로 그를 믿어 왔던 주변의 많은 이들을 집어삼켰다.

 

분명한 최악의 어른이란 갱신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타인의 정상성을 의심하고 억지로 분류할 공동체의 정상성은 훼손된다. 반대로 타인의 정상성을 의심하거나 분류하지 않고 그럴 있는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을 공동체의 정상성은 굳건해진다.

 

살다보면 별일이 있어요. 나는 말을 좋아한다. 세상은 이해할 없는 투성이다. 그렇다고 내가 경험해보지 않았거나 이해할 없는 것이 비정상을 의미하는 아니다. 왜냐하면 살다보면 별일이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일은 모든 동물이 있지만 아름답지 않은 것을 사랑할 있는 존재는 사람뿐이다.

 

(영화의 '졸업' 주인공) 부모의 질서를 부정하고 맞서고 눈앞에서 깨부순 그들은 처음에는 기쁘고 흥분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감정들은 이후에 그들이 짊어질 세상의 무게감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직면한, 당장 짊어져야 삶의 무게감을 실감하고 표정이 어두워진 것이다. 나는 장면을 아이가 어른이 되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영화는 아이가 어른이 되는 순간을 정확하게 포착한, 정말 얼마 되지 않는 희귀한 영화들 가운데 한다.

 

<졸업> 낭만이나 후회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생의 다음 페이지를 넘길 느껴지는 장의 촉감과, 그것의 어마어마한 무게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 만하다는 것에 관한 영화다.

 

청소란 공간을 완전히 이해하게 만든다.

 

지금도 집청소는 내가 한다. 써놓고 보니 당연한 말이다. 나는 인류가 자기 혼자 힘으로 청소할 없는 크기의 집을 소유하면서부터 파멸을 향한 과잉이 시작되었다고 믿는 사람이다. 부동산 취득 자격면허 같은 만들어서 시험장에서 혼자 청소할 있는 최대 평수를 측정해 있게 하면 좋겠다. 사람의 욕심을 다스릴 있는 가장 기능적인 목적의 면허가 아닌가.

 

결국, 우리는 모두 순순히 누군가의 과거가 용기가 필요하다. 돌이키고 되돌리는 것에 대한 집착은 느슨하게 내버려두고 말이다.

 

그러나 이별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방아쇠가 있었던 아니다. 그냥 그렇게 헤어진 것이다.

 

이해할 없는 일을 이해할 없는 상태 그대로 내버려둘 있는 태도야말로 삶을 살아나가는 가장 중요한 재능 가운데 하나일지 모르겠다.

 

배트맨이 슈퍼맨을 증오하는 표면상의 이유는 신과 같은 권능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그런 권능을 질투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후회를 한다. 사람이 일생에서 겪는 후회의 총량을 무게로 느낄 있다면 인류는 중력이 없이도 땅에 붙어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나이가 들수록 쪼그라드는 이유가 거기 있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아이디어 자체가 아니라 아이디어를 어떻게 운용하는지에 달려 있다. 과거와의 통신을 통해 현실을 바꾼다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어떻게 이야기를 꾸려나갈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흡사 웹상의 하이퍼링크처럼 머릿속에서 단어와 단서들이 꼬리를 이어 나만의 사유를 만들어가는 자극은 독서 이외에서 얻어내기 어려운 경험이다.

 

살다보면 삼루에서 태어난 주제에 자신이 흡사 삼루타를 쳐서 거기 있는 것처럼 구는 사람들을 만나기 마련이다.

 

이제는 혼자서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같다.

 

근본주의자들의 폭력을 진영의 이름으로 감싸안는 운동은, 언론은, 정당은 필연적으로 망한다.

 

사람들은 순백의 피해자라는 판타지를 가지고 있다. 피해자는 어떤 종류의 흠결도 없는 착하고 옳은 사람이어야만 하며 이러한 믿음에 균열이 오는 경우 '감싸주고 지지해줘야 피해자' '그런 일을 당해도 할말이 없는 피해자' 돌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순백의 피해자란 실현 불가능한 허구다. 흠결이 없는 삶이란 존재할 없다.

 

나쁜 피해자 착한 피해자를 나누고 순수성을 측정하려는 시도들의 중심에는 의도가 있다.

 

내가 편들고 싶은 것을 위해서라면 프로파간다라도 상관없다는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그들이 비판하고자 하는 이들과 동업자다.

 

왕따를 검색해보면 연관검색어로 가장 먼저 뜨는 왕따를 당하지 않는 방법이다. 왕따를 당하고 있을 알려야 곳이나 해결할 있는 과정을 다루는 대처법 같은 검색어에 없다. 예방법을 찾아보되 해결책은 포기한 병증. 그것이 지금 한국의 왕따 문제다.

 

한국에서 왕따 문제를 다루는 방법은 내부고발자를 다루는 모습과 묘하게 닮아 있다. 어떻게든 내부에서 조용하게 해결하길 바란다. 부조리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내부고발자 개인의 성향을 들어 조직에 어울리지 못하는 부적응자의 문제로 바꾸어버린다. 남들도 그러는데 우리 뭐만 가지고 그러냐는 옹호성 관전자들이 생겨난다. 그마저도 관심은 잠깐이고 내부고발자는 결코 보호받지 못한다.

 

물에 빠져 구조를 기다리던 아이들이 어른 시키는 대로 했다가 떼죽음을 당했다. 학교폭력으로부터 구해달라고 자기 발로 찾아간 어른과의 면담에서 어떠한 희망도 찾을 없었다. 어른들은 언제나 면피만 해결의 의지가 없다. 그런 세상이다. 구제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깨달은 개인이 선택할 있는 자력구제뿐이다. 대체 아이들에게 칼을 쥐어주는 누구인가.

 

나는 세상에 면목이 없다. 어른이 만든 세상에서 어른이 하라는 대로 했다가 경계로 내몰린, 교복을 입고 있는 세대 앞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우리가 이렇게 만들어버렸다.

 

'폭력이 동원되더라도 강하게 통제하고 억압할수록 개인에게 동기가 생기고 세상은 굴러간다' 겉으로 주장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그게 내심 불편한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는 우리 사회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소년은 부조리한 질서로부터 어떠한 유산도 이어받기를 거절한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따위가 아니라 모두에게 치의 오차도 없이 엄정하게 적용될 원칙과 약속이다.

 

과거는 대개 창피한 것이다. 그것을 사실 그대로 돌아볼 있는 정직함만이 위대하다.

 

제때 정리되지 못한 과거는 대를 이을수록 그렇게 현실을 더욱더 공정하지 않게, 아프게, 속절없이 병들게 한다.

 

[우리가 싸워야 하는 이유]

 

우리가 싸워야 하는 이유는, 열심히 일하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고 의지만 있다면 반드시 공정한 기회를 보장받으며 규칙을 지켜도 물에 빠져 죽지 않는다는 우리 다음 세대에게 증명 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룰을 지키는 사람들이 행복한 나라. 잘못이 있으면 그걸 바로잡을 있는 저력을 가진 공동체, 그것이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줘야만 유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