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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싶은 말들

[온라인새벽기도] 대가를 치르며 살라

by manga0713 2021. 5. 21.

[ 렘브란트 - 성 스테파누스의 순교 ]

 

 

본문말씀 : 민수기 8장 5-8절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6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데려다가 정결하게 하라 7 너는 이같이 하여 그들을 정결하게 하되 곧 속죄의 물을 그들에게 뿌리고 그들에게 그들의 전신을 삭도로 밀게 하고 그 의복을 빨게 하여 몸을 정결하게 하고 8 또 그들에게 수송아지 한 마리를 번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그 소제물로 가져오게 하고 그 외에 너는 또 수송아지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가져오고

 

 

< 몸을 정결하게 하라 >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 중 레위인을 데려다가 정결하게 하라고 말씀하셨다(5-6절). 레위인의 정결을 위해 3가지를 행했다(7절). 첫째, 속죄의 물을 그들에게 뿌렸다. 속죄의 물은 붉은 암송아지를 태운 재를 섞어 만든 물로써(민 19:2-9) 인류의 죄를 속하는 예수님의 보혈을 예표한다(히 10:22). 둘째, 그들의 전신을 삭도로 밀었다. 즉 머리에서 발끝까지 신체의 모든 털을 깨끗이 면도해 물로 씻기지 않은 불결함까지 철저히 제거했다. 셋째, 의복을 빨게 했다. 그것도 부정과 불결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조치였다.

 레위인의 정결 의식은 당시 치유된 나병환자의 정결을 공표할 때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몸을 씻는 의식과 거의 같았다(레 14:8). 죄를 나병과 동일시했다는 암시다. 그처럼 하나님께 헌신된 존재가 되려면 몸과 옷은 물론 마음과 영혼까지 성결해야 한다. 성결함이 없으면 어둠과 불결로 뒤덮인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다. 어두운 현실을 이겨내려면 하나님의 일꾼부터 성결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요즘 기독교의 세속화는 큰 문제다. 기독교가 불의를 꾸짖는 의의 기준이 되지 못하고 있다. 사회 곳곳에 미친 어둠의 얼룩을 닦아내는 역할을 하는 정결한 하나님의 일꾼이 절실히 필요하다. 사실상 많은 위대한 일이 더러워진 얼룩을 닦아내고 불결함을 청소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옛날에는 참된 선생이 참된 제자를 길러내기 전에 마당 청소나 마구간 청소부터 시켰다. 그 일을 통해 마음을 청소하는 훈련부터 시킨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한 공동체의 죄와 불결을 막아내는 선봉 역할을 하도록 레위인들의 정결 의식을 통해 그들에게 정결한 삶을 도전하고 의식화시키셨다. 영적인 의미에서 성도는 교회에 온전히 속해 있으면서도 사명감을 가지고 나의 것을 희생하고 세상 경계로 나아가야 한다. 모험이 없으면 발전도 없고 사명도 이룰 수 없다. 위태함을 감수해야 권태감을 극복할 수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거룩한 사명을 따라 안전한 삶의 터전을 떠날 수 있어야 아브라함의 축복을 공유할 수 있다.

< 대가를 치르며 살라 >

 레위인을 하나님께 드릴 때 필요한 제사는 번제, 소제, 속죄제였기에 각각의 제사를 위한 제물이 필요했는데 번제물로는 수송아지 한 마리, 소제물로는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속죄제물로는 수송아지 한 마리가 요구되었다(8절). 번제물과 속죄제물로서 값비싼 예물인 수송아지가 요구된 것은 그만큼 레위인 정결 예식이 중요한 예식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값비싼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해야 한다는 암시다.

 늘 대가를 치르려는 책임적인 존재가 되라. 예수님은 늘 치를 대가를 인식하며 사셨기에 삶의 가벼움이 없으셨다. 특히 예수님의 예루살렘 행은 대개 유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거기서 십자가를 지고 삶을 마감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마다 십자가의 희생에 대한 생각으로 종종 깊은 침묵에 잠기셨을 것이다. 그때도 제자들은 세상적인 욕망을 따라 종종 철들지 않은 모습을 보였지만 예수님은 실망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며칠 전에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실 때 잎이 무성한 데도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보셨다. 그 무화과나무를 통해 형식과 소리와 행동은 많아도 참된 희생의 열매가 없었던 교권주의자들을 연상하며 이렇게 생각하셨을 것이다. “네가 잎이 무성해서 화려하게 보이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네 모습이 말뚝과 같구나.” 그런 속마음이 표출되어 당시 희생의 열매가 없는 종교인들에 대한 경고의 음성이 저주처럼 흘러나왔을 것이다. 결국 그 무화과나무는 말라죽었다.

 십자가의 대가를 치를 줄 모르는 삶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아니고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예고한다. 왜 형식은 있어도 내용이 없는 허전한 인생이 펼쳐지는가? 대가를 치르는 삶의 부족 때문이다. 야망과 욕심으로 인해 나의 심령이 혼미에 빠지지 않게 하라. 어디서든지 비싼 대가를 치르려는 삶에서 내빼거나 뒤처지지 말라. 그래야 내 삶에 이기심의 독버섯이 자라지 않고 공허함의 신기루가 드리워지지 않는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