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말씀 : 민수기 33장 50-56절
50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강 가 모압 평지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51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52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깨뜨리며 산당을 다 헐고 53 그 땅을 점령하여 거기 거주하라 내가 그 땅을 너희 소유로 너희에게 주었음이라 54 너희의 종족을 따라 그 땅을 제비 뽑아 나눌 것이니 수가 많으면 많은 기업을 주고 적으면 적은 기업을 주되 각기 제비 뽑은 대로 그 소유가 될 것인즉 너희 조상의 지파를 따라 기업을 받을 것이니라 55 너희가 만일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가 남겨둔 자들이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56 나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
< 비전 성취를 위한 말씀 >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 후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강가 모압 평지에 있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가나안의 비전 성취를 위한 말씀을 주셨다. 어떤 말씀인가?
1. 가나안을 점령하라 - 자기를 정복하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주기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거룩한 땅으로 만들도록 원주민을 몰아내고 우상을 다 깨뜨리고 산당을 다 헐고 그 땅을 점령해 거주하라고 말씀하셨다(51-53절). 그 말씀은 가나안을 점령해 강대국으로 만들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성결한 국가로 만들라는 뜻이다.
구약 성경의 많은 말씀은 복된 삶을 위한 영적인 교훈으로 주어진 것이지 그 말씀 그대로 따라하라고 주어진 것만은 아니다. 즉 가나안 땅을 점령하라는 말을 근거로 이웃 국가를 침략하고 그 국민을 불신자란 이유로 죽이는 기독교 탈레반이 되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고 처음 하신 땅을 정복하라는 문화 명령(창 1:28)은 약탈적인 정복자가 되라는 말씀이 아니라 땅을 잘 관리하라는 말씀이다.
가나안을 점령하라는 명령도 “마귀의 세력을 정복하라. 불신앙적인 요소와 세속적인 욕망을 이겨내라.”라는 영적인 의미가 있다. 즉 세상을 정복하기 전에 세속적인 자기를 먼저 정복하고 구체적으로 자신의 이성과 감정과 기분도 정복하라. 가끔 너무 억울한 일을 당하면 분노가 생기고 심해지면 한이 맺힌다. 그때 한에 사로잡히면 상황이 더 어려워지는 경험을 통해 내려놓는 법도 배우고 용서 능력도 얻는다. 그리고 나중에 보면 분노와 폭력을 자제하고 인내하고 용서한 것이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자기감정을 이기는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란 신분과 자부심이 큰 역할을 한다. 크게 보면 구원에는 악한 감정과 힘든 상황에서 구원받는 것도 포함된다. 자기감정을 지혜롭게 잘 정복하라. 하나님의 자녀란 신분을 중시하면 그 신분이 자신을 정복할 힘을 배가시켜 주고 성도다운 삶에 대한 책임의식도 키워 준다. 남의 눈치를 보며 비겁하게 살지는 말되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책임적으로 살라.
성도에게는 감정을 다스릴 최상의 무기가 있다. 무엇인가? 성도가 당하는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몰라도 좋고 꼭 알아야 필요도 없다. 다만 살면서 나를 낮추게 만드는 수많은 사건에는 나를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 자기 정복은 모든 정복 중 최고의 정복이다. 쉽지 않아도 그 일을 이루면 더 본질적인 진리를 얻고 믿음이 커지고 영적으로 앞서게 되고 비전 성취의 때도 가까워질 것이다.
2. 제비 뽑아 나누라 - 공평하게 나누라
가나안 땅은 각 지파의 인구수에 따라 공평하게 주되 어떤 땅을 차지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인간적인 욕심을 배제하려고 제비 뽑아 나누게 했다(54절). 왜 가나안 땅을 아직 얻지 못했는데 땅 배분 말씀부터 하셨는가? 가나안 땅 정복 비전을 구체화시켜 각 지파의 사기를 높이려는 목적도 있지만 사전에 공평한 땅 분배 원칙을 미리 교육해서 땅을 차지한 후 내분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문제가 생긴 후 잘 수습하기보다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낫다. 특히 전쟁은 인간 사회에 가장 무서운 참극을 낳기에 전쟁이 벌어진 후 용감하게 싸우기보다 전쟁을 최대한 막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전쟁이 이미 벌어지면 아무리 용감하게 나라를 잘 지켜도 국민이 무서운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더는 문제를 대비하고 막아내는 선견지명과 협상 능력과 리더십을 갖춰야 한다.
모세는 선견지명이 있는 리더였다. 그 선견지명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 삶의 열매였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나안 땅을 미리 공평하게 배분해 가나안 땅을 얻는 의지를 불태우게 하면서 욕심으로 인한 내분을 사전에 방지했다. 비전 성취도 중요하지만 그 성취로 인한 열매를 어떻게 나누는가도 중요하다. 그때 각각의 공로와 헌신과 현실에 따라 최대한 공평하게 나누려고 하라.
3. 원주민을 몰아내라 - 죄를 뿌리 뽑으라
하나님은 값싼 동정심으로 가나안 원주민들을 몰아내지 않으면 그들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고 하셨다(55절). 그 말씀은 죄를 뿌리 뽑으라는 상징적인 말씀이다. 값싼 동정심을 품고 죄의 세력에 이끌리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래서 좋은 만남이 중요하다. 그런 만남을 위해 기도하라. 어떤 사람이 내 영혼에 잘못된 말을 계속 집어넣는다면 그 상황을 그냥 방치하지 말라. 사람을 차별하지는 말되 멀리할 상황이라면 멀리하라. 살면서 때로는 부정적인 영향권에서 잠시 물러서거나 멀어지는 전략도 필요하다.
어느 날 다리 위에 있던 두 사람 중 하나가 강에 뛰어들려고 했다. 옆 사람이 말렸다. “왜 그러세요? 문제가 뭔가요? 제게 문제를 말해보세요.” 그렇게 둘이 한참 대화한 후 둘 다 강에 뛰어들었다는 의미심장한 유머가 있다. 계속되는 부정적인 얘기에 휩쓸리면 자신도 부정적으로 된다는 뜻이다. 기도 모임을 잘 해야 하는 이유도 서로를 위해 기도한다면서 서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때도 많기 때문이다.
많은 교회에서 기도 모임이 갈등과 분열의 씨앗이 되는 현실은 한국 교회의 가장 아픈 현실 중 하나다. 왜 교회를 위한 기도가 교회를 깨뜨리는 아픈 현실을 낳는가? 교회를 깨뜨리려고 작정한 악인 때문이 아니라 기도 모임의 참된 속성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 기도한다면서 기도하기도 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라. 그래서 잘 준비된 사람이 기도 모임을 이끌어야 한다. 동정심은 소중한 것이지만 동정심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면 해가 될 때도 많다.
남의 부정적이고 한스러운 얘기를 계속 들으면 안타까워서 기도도 나오고 동정심도 생긴다. 때로는 힘을 주려고 돈도 준다. 그래도 계속 불평하는 사람에게는 돈 지원도 거의 효과가 없다. 좋은 자리나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어도 나중에는 실망스런 얘기나 원망을 들을 때가 많다.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어느 날 깨닫는다. “이러면 하나님이 이끄시는 나의 사명적인 길이 자꾸 저해되는구나.” 동정심도 바르게 펼쳐져야 하나님 나라 확장에도 좋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도 이룰 수 있다.
어느 날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 발아래 엎드려 병든 자기 딸을 살려달라고 했다. 예수님이 그를 따라갈 때 큰 무리들 중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어 예수님의 행보가 지체되었다. 그때 회당장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그 딸이 죽었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다른 제자들은 “왜 나를 차별하지? 상처 받았다.”라고 할 수 없다.
예수님이 회당장의 집에 도착해 사람들이 떠들고 울며 심히 통곡하는 것을 보고 그 집에 들어가 말씀하셨다. “너희가 왜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다.” 그때 사람들이 비웃자 예수님이 그들을 다 내보내셨다(막 5:40). 그때 사람들이 “왜 나를 내보내지? 상처 받았다.”라고 할 수 없다. 예수님은 사랑이 많으시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부정적인 사람을 문 밖으로 내보내신다.
결국 예수님은 자신과 함께한 자들만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이라고 하셔서 아이를 살리셨다. 사람들이 크게 놀랄 때 예수님이 경계하며 말씀하셨다.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렇다고 “왜 그 일을 비밀에 붙이지? 왜 내게 비밀로 하지? 상처 받았다.”라고 할 수 없다. 부정적인 면만 보면 예수님에게서도 상처 받을 일이 많다. 예수님도 때로는 누군가를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고 문밖으로 내보내 멀리하셨고 누군가에게는 어떤 사실을 비밀로 붙이셨다.
사랑한다는 것이 나쁜 것이나 불신적인 것도 용납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어디서든지 부정적인 영향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서 자신의 복을 지키라.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면서도 그와의 대화나 만남을 멀리하는 길을 선택해야 할 때도 있다. 사명의 길로 나아가는 데 계속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 상황에서 그 상황에 매몰되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부정적인 당사자에게도 좋은 것이 아니다.
지금 내가 누구와 동행하고 동역하는지 깊이 생각해보라. 부정적인 영향을 계속 받으며 살기에 인생은 너무 짧고 사명은 너무 크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길 원하는 일을 위해 나의 소중한 시간을 가치 있게 쓰라. 계속 부정적인 영향을 받아 참된 복이 막히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 영적인 에너지가 고갈되면 그 상황을 지혜롭게 끝내라. 필요하다면 예수님처럼 믿음이 없이 떠들며 우는 사람을 지혜롭게 문밖으로 내보냄으로 찬란한 비전을 훌륭한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복된 심령이 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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