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말씀 : 다니엘 11장 2-4절
2 이제 내가 참된 것을 네게 보이리라 보라 바사에서 또 세 왕들이 일어날 것이요 그 후의 넷째는 그들보다 심히 부요할 것이며 그가 그 부요함으로 강하여진 후에는 모든 사람을 충동하여 헬라 왕국을 칠 것이며 3 장차 한 능력 있는 왕이 일어나서 큰 권세로 다스리며 자기 마음대로 행하리라 4 그러나 그가 강성할 때에 그의 나라가 갈라져 천하 사방에 나누일 것이나 그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또 자기가 주장하던 권세대로도 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 나라가 뽑혀서 그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로 돌아갈 것임이라
< 예언의 의미와 목적 >
기독교에서 예언이란 주제만큼 겸손이 요청되는 주제는 없다. 예언 문제에서 미래를 자세히 다 아는 것처럼 과시하는 교주를 따르지 말라. 하나님은 구원에 관한 여러 말씀을 주셨지만 구원 계획의 전개나 과정에 대한 획일적인 공식은 주시지 않았다. 성경 예언을 고등수학처럼 여기지 말라. 성경 말씀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 것보다 훨씬 큰 의미를 내포하기에 이미 이뤄진 사실을 근거로 미래에도 유사한 상황이 펼쳐질 것으로 단정하지 말라.
예언은 놀라게 하거나 두렵게 하거나 충격을 주거나 호기심을 유발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또한 현재의 절망과 불안을 진정시킬 진정제가 아니라 현재의 실천을 촉구하는 촉매제에 가깝다. 예언 자체에 너무 사로잡히면 현실과 역사와 사회에 유익을 주지 못한다.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이 임박했다는 주장에 몰입해 매일의 성실한 삶을 외면하고 계획이나 전략이나 저축이나 보험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미래에 대한 예언과 약속은 현재의 행동에 대한 요청이다. 현재의 충실한 삶을 낳는 예언이 참된 예언이다. 미래에 대한 예언이 현재의 삶과 행위를 변화시키는 동기가 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예언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을 통해 더 나은 변화를 이끌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변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역사는 변할 수 있기에 예언을 통해 선한 변화가 나타나면 하나님은 그 전에 하신 말씀과 다르게 역사하신다.
내가 돌이키면 하나님도 돌이키시고 내가 돌아서면 하나님도 돌아서신다. 성경에는 그런 약속이 많이 나오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성품은 그 사실을 보증한다. 결국 회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내가 진심으로 돌아서면 하나님은 늘 나를 맞아 주시고 그때부터 새로운 축복 역사를 펼치신다. 그런 의미에서 금년이 새로운 축복 역사를 만드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금년에도 현실에 충실하고 하나님께 몸과 마음을 온전히 향함으로 더 나은 새로운 복을 예비하라.
< 교만에 빠지지 말라 >
본문에는 바사, 헬라에 관한 다니엘의 예언이 나온다. 본문 2절 중반에 언급된 ‘바사에서 일어날 세 왕’은 캄비세스, 스멜디스, 다리오를 뜻한다. 2절 후반에 언급된 ‘그가’는 바사의 크세르크세스 왕(주전 486-465년)이다. 그는 본문에서 ‘헬라 왕국’으로 묘사된 마케도니아를 침공해서 잠시 정복했다. 그 후 마케도니아에서 한 왕(알렉산더 대왕)이 등장해 정복 사업을 펼쳤다(3절). 알렉산더가 대 제국을 이뤄 강성할 때 갑자기 죽고 그의 나라는 알렉산더의 자손에게 돌아가지 않고 여러 나라로 갈려 알렉산더의 휘하 장군들에게로 돌아간다(4절).
본문의 예언이 주는 핵심 교훈은 잠깐의 승리로 교만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한때 당할 나라가 없었던 바사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했다. 알렉산더도 단기간에 대 제국을 이뤘지만 32세에 열병으로 죽고 그의 어린 아들도 부하에 의해 살해되고 그의 이복형제까지 암살되어 그의 혈통은 끊겼다. 그 사실은 사람의 영화를 자랑하지 말고 사람의 계획을 너무 신뢰하지 말라는 교훈을 준다.
아무리 사람이 잘 계획해도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고 그 계획대로 실천하며 살기도 쉽지 않다. 매년 1월이 되면 담배 소비량이 감소해도 2월이 되면 다시 담배 소비량이 급증한다. 연초에 담배를 끊겠다고 한 결심을 포기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힘으로는 담배 하나 끊기도 어렵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아무리 선한 계획을 세워도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이 주셔야 한다.
솔로몬이 지은 시편 127편 1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솔로몬은 7년의 성전 건축과 13년의 왕궁 건축을 통해 건축 문제에 능숙해졌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집을 세워 주시지 않으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고 했다. 최고의 권력과 지혜를 가진 솔로몬이 그렇게 고백했다면 내게는 그런 겸손한 고백이 더 필요하다.
< 하나님 의식을 가지라 >
일전에 많은 유튜브 구독자를 가진 한 남미 여성이 한국을 방문한 후 자기 눈에 비친 한국의 모습을 보고 신비한 세계에 온 것처럼 놀라는 영상을 띄웠다. 특히 거리에서 잘 어울리는 옷차림을 한 유치원생쯤 되는 여아가 비싼 스마트폰으로 누군가와 통화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크게 놀랐다. 남미에서 그렇게 다니면 순식간에 아이와 함께 폰도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처럼 놀라운 일들이 한국에서는 일상적인 것임을 깨닫고 그녀는 한국이란 나라가 제공하는 안전이 너무 부러웠다고 했다.
삶에서 물질이나 소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안전과 평화다. 타인 감수성이 발달한 최고의 선진 문화를 통해 안전과 평화를 일상에서 풍성하게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행복의 조건이다. 옛날에 스페인 정복자들이 신대륙 남미에 가서 황금이 지천에 널린 것을 보고 놀랐듯이 남미 관광객들은 지천에 널린 한국의 안전에 대해 놀라며 부러워하고 있다. 그처럼 일상에서 풍성하게 누리는 안전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라.
사람에게 ‘하나님 의식’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고백이 있지 않아도 최소한 하나님 의식만이라도 인간 내면에 있어야 사람은 사람답게 된다. 또한 하나님 의식이 있어야 타인 감수성이 넘치는 선진 민족이 되고 민족적인 교만도 극복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잠재된 하나님 의식을 하나님에 대한 고백적인 믿음으로 발전시키고 겸손하게 다른 민족을 사랑으로 섬기는 선교하는 민족을 꿈꾸라.
기적적인 은혜가 없어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상의 은혜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깨달아 알라. 삶에서 큰 사고가 없이 매일을 살아가는 것도 큰 은혜다. 어떻게 그런 은혜가 있게 되었는가? 하나님이 매 순간을 지켜주시기 때문이다. 은혜를 일상에서 풍성하게 누리기 때문에 오히려 깨닫지 못하는 영적인 사치가 있지는 않은지 성찰하며 감사와 겸손을 잃지 않아야 은혜가 지속되고 큰 사고가 면제된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불행한 일이 어느 날 내게도 닥칠 수 있음을 잊지 말라.
< 온전히 믿고 맡기라 >
사고로 갑자기 죽는 일이나 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는 일이 나의 일이 될 수도 있기에 하나님께 수시로 나의 인생과 가정과 믿음을 지켜달라고 기도하라. 자신의 힘과 능력과 도덕성을 믿다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 같은 큰 문제를 당한 후 하나님께 돌아선 사람도 많다. 사람들은 죄가 없으면 문제도 없을 것이라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지만 극심한 고난이 갑자기 파도처럼 연속해서 찾아와 그의 모든 삶을 휩쓸어 갔다.
가난과 질병과 고난이 나의 죄와 잘못 때문에 생기는 것만은 아니다. 하나님의 신비하고 오묘한 계획과 섭리는 사람의 계획과 상상을 초월한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으로 모든 일을 쉽게 판단하지 말라. 세상일은 사람의 계획과 예측대로 되지 않는다. 결국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은혜다. 하나님이 외면하시면 오늘이라도 인생은 끝나고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모든 인간적인 수고는 순식간에 물거품이 된다.
서울 인근에 같은 교단에 소속된 두 명의 개척교회 목사가 있었다. 둘은 기도 스타일이 달랐다. A 목사는 금요일에 기도원에 가면 골방에 들어가 실컷 기도도 하고 실컷 잠도 자면서 토요일 아침이 되면 얼굴이 훤하게 되어 기도원을 내려갔다. 반면에 B 목사는 금요일에 기도원에 가면 근처의 좋은 바위에 터를 잡고 밤새도록 “주여!” 하고 부르짖고 토요일 아침이 되면 목이 쉰 채 피곤한 얼굴로 기도원을 내려갔다.
6개월쯤 지난 후 B 목사가 선배 목사를 찾아가 말했다. “목사님! 요새 참 실망이 됩니다. 하나님은 너무 불공평하신 것 같습니다. 금요일에 기도원에 가면 초저녁부터 방에서 잠자며 기도하는 A 목사의 교회는 급속히 부흥하는데 바위에서 밤새 철야기도를 하는 저의 교회는 전혀 부흥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선배 목사가 말했다. “목사님도 잘 주무십시오. 교회를 개척하면 얼마나 근심과 스트레스가 많습니까? 그런데 A 목사님은 근심과 스트레스를 ‘하나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깁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 믿습니다.’ 하고 기도하면서 잠도 잘 자니까 얼굴이 훤해져서 교인들이 ‘우리 목사님은 기도원에 갔다 올 때마다 얼굴이 훤해지네.’ 하고 얼굴만 봐도 은혜가 되어 교회가 부흥되는 것입니다.”
선배 목사의 말은 바위에서 철야기도를 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 아니라 믿고 맡기는 삶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믿음과 잠을 주시고 그 가정과 행복도 지켜주신다. 믿음은 따뜻한 언어나 편안한 잠이나 밝은 얼굴을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믿음은 사람의 어떤 수고보다 중요하다. 항상 하나님의 뜻과 믿음 안에서 행복과 평안을 누리고 오늘이 내일의 승리를 위한 출발점이 되게 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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