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말씀 : 고린도전서 15장 1-11절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1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 죽음을 인식하며 살라 >
사람에게 부활의 믿음과 천국 소망이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감사한 일이고 깊은 안도감을 준다.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달렸다. 또한 이 땅에 올 때는 순서가 있지만 떠날 때는 순서가 없다. 그처럼 사람이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인식하면 인생이 진지해진다. 예전에는 죽는 얘기를 하면 재수 없게 여겼지만 죽음에 대한 생각은 재수 없는 생각이 아니라 의식을 깨우는 생각이다.
또한 예전에는 숫자 4자를 죽을 사자로 여기고 재수 없게 여겼다. 저도 그런 줄 알았지만 믿음이 깊어지면서 하나님 안에서 숫자 4자는 죽어야 사는 믿음의 원리를 따라 오히려 복된 숫자로 여기는 인식의 대 전환이 생겨났다. 억지로 혹은 부주의해서 죽음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 열심히 최대한 건강하게 살되 언젠가 있을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말라. 죽음을 너무 두려워하기에 죽은 사람이나 귀신이나 어둠도 두려워하게 된다. 죽음을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죽음을 진지하게 준비하라.
나는 가끔 딸들에게 말한다. “아빠가 이 땅을 떠나도 너무 슬퍼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 해. 천국의 삶이 어떤 형태로 펼쳐질지 잘 몰라도 천국에서 너희를 지켜보고 기도해 줄게.” 천국의 삶의 형태는 하나님이 신비의 영역으로 두셔서 아무도 정확한 실체를 모른다. 그러나 먼저 천국에 간 성도가 이 땅에 남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천국에서 기도해 준다는 표현은 신실한 선대나 성도의 기도가 결코 헛되지 않다는 의미에서 비유적으로나 상징적으로 얼마든지 쓸 수 있는 표현이다.
얼마 전에는 둘째 딸이 거꾸로 내게 말했다. “아빠, 혹시 제가 먼저 천국에 가면 딱 3일만 슬퍼하고 금방 슬픔을 털고 일어나셔야 해요.” 내가 유머를 섞어 말했다. “아니, 하루만 슬퍼할게.” 딸이 말했다. “정말 그렇게 하세요. 그래도 저는 천국에서 섭섭해 하지 않을게요.” 그때 “알았어.”라고 대답한 후 서로 쳐다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천국 소망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고 오히려 죽음을 유머 주제로 삼게 한다. 그 천국 소망이 넘치게 한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었다.
< 부활의 믿음을 가지라 >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상 최대 사건이고 나의 부활은 나의 삶에서 최대 사건이자 최대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 주제다. 부활의 믿음이 없다면 헛된 믿음이다. 언젠가 부활의 때가 되면 살아있는 성도는 영광체로 변하고 죽은 성도는 영광체로 부활할 것이다. 부활 후의 삶에 대한 수많은 호기심을 일으키는 이야기에 너무 몰입하지 말고 그 신비는 하나님의 영역에 두면서 부활의 믿음만은 굳건히 가지라.
부활의 믿음을 가장 저해하는 냉소를 삼가라. 의문은 품어도 냉소적인 태도는 버리라. 신실한 성도도 때로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세례 요한도 한때 의문을 품었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그러나 기본적인 믿음의 바탕은 잃지 않았다. 냉소는 불신이 체질화된 것이기에 더 나쁜 것이다. 냉소가 섞인 질문은 문제를 풀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문제를 얽히게 하기 위한 질문이다. 냉소적인 질문은 정직한 의문이 아니라 조롱하려는 질문이다.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질문할 때는 냉소하는 태도를 버리고 하나님에 대한 기본 신뢰를 가지라. 그러면 문제 해결의 길이 열린다. 욥도 극심한 고난으로 하나님에 대한 의문을 가졌지만 때가 되면 반전의 역사가 나타나 하나님이 영광의 자리로 이끄실 것을 믿었다. 하나님 앞에 영광스럽게 서는 것은 믿음 생활의 최종 목표다. 잠시 일이 잘 된다고 교만해지지 말고 잠시 일이 안 된다고 비참해지지 말라. 언젠가 때가 되면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다. 그때를 잘 준비하며 살라.
< 은혜 받은 자에게 있는 것 >
고린도전서 15장은 초대교회 당시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첫 기록으로서 부활장으로 불린다. 4복음서가 다 끝부분에 부활을 언급하는데 그중 가장 먼저 쓰인 마가복음이 주후 약 65-70년경에 마가에 의해 기록되었고 고린도전서는 그보다 약 10년 전에 사도 바울에 의해 기록되었다. 바울은 부활장을 기록하면서 자신이 받은 은혜부터 고백한다. 그 고백을 통해 받는 교훈으로써 성도에게 있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1. 부활의 믿음
본문 1-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복음을 확실히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복음은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3-4절), 즉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의 핵심 내용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다. 그 믿음을 고린도 교인이 확고히 가지도록 예수님의 부활을 변증한 내용이 15장의 전체 내용이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이 성경대로 이뤄졌다고 했다(3절).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도들은 대부분 순교했다. 어떻게 그들이 순교할 수 있었는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부활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꾸며냈다면 누가 꾸며낸 거짓말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지겠는가?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했다. 사도신경은 이런 고백으로 끝난다.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지금도 살아계시고 구원받은 성도도 부활한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라.
부활의 믿음을 가지는 것은 쉽지 않다. 예수님과 가까이 지냈던 막달라 마리아,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디베랴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던 제자들도 처음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 영적인 눈이 열려 알아보게 되었다. 부활의 능력을 실제로 체감하지 못하면 부활의 믿음을 구하라. 부활의 믿음을 통해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면 전인적인 치유도 이뤄지고 세상을 치유하는 능력자도 될 수 있다.
2. 겸손한 마음
바울은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고 하면서 그런 자신에게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보이셨다고 고백했다(8절). 그 고백을 보면 그는 자신처럼 부족한 사람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만나주셨다는 은혜에 크게 감격했음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자신을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칭하면서 자신이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너무 부족한 사람이라고 겸손하게 고백했다(9절). 진짜로 은혜 받으면 그런 겸손한 마음이 생긴다.
겸손하다는 것은 머리를 숙이거나 자세를 낮추는 것 이상이고 위치와 지위를 낮추는 것 이상이다. 겸손한 마음을 가질 때 꼭 생기는 태도가 낮고 비천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태도다. 불의하게 소외된 약자를 볼 때 어떤 마음을 가지느냐에 따라 교만과 겸손이 극명하게 갈린다. 그때 약자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마음은 대개 겸손한 마음이다. 참된 겸손을 원하면 불의하게 소외된 약자와 연대하는 마음을 훈련하라. 그렇게 훈련된 사람이 진짜 강자이고 인격자이고 복 받을 자다.
하나님은 의로운 성도의 눈물을 기억하신다. 또한 불의하게 소외된 사람을 기억해 주는 사람을 기억하신다. 나사로의 신음에 귀를 기울이라. 물론 모든 나사로를 내가 다 돕지는 못한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보여도 대부분은 그냥 지나친다. 그래도 나사로의 신음을 들으려는 겸손한 마음의 바탕만은 늘 가지라. 그런 마음의 바탕을 가지고 살다가 어느 순간에 누군가를 위해 기도와 후원의 손길을 펼치고 싶은 감동이 생기면 그 감동을 따라 과감하고 겸손하고 조용히 실천에 나서라. 소리 내어 자랑하면서 살지 말고 소리 없이 자랑스럽게 살라.
3. 깊은 만족감
본문 10절에 나오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라고 한 바울의 고백은 겸손함과 더불어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만족감도 나타낸다. 그 고백에는 이런 의미가 담겨 있다. “나의 현재의 모습은 하나님이 있게 하셨고 고난과 문제도 하나님의 허락 하에 주어졌습니다. 결코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 나의 부족함도 있게 하셨습니다. 나는 현재의 내 모습이 하나님의 최선의 작품임을 믿고 실망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남처럼 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남을 바라보고 비교하면서 열등감에 빠지지 말라. 누구에게나 열등감은 있지만 중요한 것은 열등감을 내면화시키지 않는 것이다. 내가 못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내가 잘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라. 나의 현재 모습에 만족하고 자부심을 가지며 그렇게 만드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확신하라. 바울처럼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하며 현재의 내 모습으로도 얼마든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음을 믿으라.
남의 은사나 처지도 부러워하지 말라. 그와 똑같이 될 필요가 없다. 공장에서 찍어낸 상품은 다 똑같다. 남과 똑같은 상품 인생을 살지 말라. 나는 나만의 유일한 작품인생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라. 진짜 행복한 사람은 ‘정상에 올라선 사람’이 아니고 ‘우주에서 유일한 작품 인생으로 사는 사람’이다. 나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의 현재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된다.
바울처럼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하며 살라. 나의 소유나 성취보다 나의 존재에 더 관심을 가지라.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예수님의 신부다. 나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의 은혜를 앞세워 살라. 바울이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좋은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렸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은혜는 이슬처럼 꾸준히 내게 내리고 있다. 늘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힘써 은혜를 갚으려는 삶을 통해 새로운 은혜를 예비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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