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말씀 : 누가복음 21장 20-28절
20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21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것이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22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니라 23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24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25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26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27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28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 종말을 잘 대비하는 길 >
요한계시록 13장을 보면 적그리스도는 죽었다가 살아나는 기적과 화려한 이미지 메이킹으로 영혼을 미혹한다. 그러므로 종말 시대에는 기적 중심적인 믿음보다 말씀 중심적인 믿음을 더욱 앞세우라. 말씀 지식이 부족했기에 1999년 이전에는 주전 4천년과 주후 2천년인 총 6천년의 인류 역사가 예수님의 재림으로 마감되고 2000년부터 천년왕국이 시작될 것이라는 시한부 종말론이 많이 먹혔다. 그러나 2000년이 지나도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특별한 변화가 없으니까 시한부 종말론도 급격히 쇠퇴했다.
시한부 종말론은 말씀을 조금만 알아도 미혹될 사상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종말의 날과 때를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고 하셨다(마 24:36). 다만 성경이 종말 징조에 관해서는 곳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런 종말 징조들을 잘 살피며 준비하되 종말 날짜에 집착하지는 말라. 종말 믿음이 없는 것도 위기지만 종말 준비가 없는 것은 더 큰 위기다. 종말을 잘 대비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1. 시대를 분별할 줄 알라
본문 20절을 보라.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주후 68년 유다의 독립 전쟁으로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은 예루살렘을 에워쌌다. 그때 네로의 자살로 로마가 내전 상태가 되자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로 귀환해 평민 출신의 첫 로마 황제가 된다. 그리고 주후 70년에 그의 아들인 티투스(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또 에워싸인 후 멸망했다. 본문에 언급된 ‘예루살렘의 에워싸임’은 티투스 때와 관련된 예언보다는 종말 시대와 관련된 예언일 가능성이 크다.
종말 시대는 어떻게 펼쳐지는가? 19세기 초 미국의 종말론 견해는 느긋하고 낙관적인 후천년설이 우세했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에 안식교에서 시한부 종말론을 내세웠고 자유신학을 거부하는 복음주의의 일파로서 넬슨 다비가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내세웠다. 전천년설의 재림 임박 사상은 전도에 효과적이었기에 당시 많은 부흥사들과 선교 단체가 전천년설을 내세웠지만 그것이 종말론의 주류 견해는 아니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전천년설은 그 대전을 종말 징조로 여기며 널리 확산되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로 전천년설(premillenialism)은 근본주의(fundamentalism)란 명칭을 사용하며 영향력이 더 커졌고 1948년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독립은 전천년설의 확산을 급속히 촉진시켰다. 미국의 정통 세대주의 신학은 구원의 역사를 일곱 천년 세대로 나누며 대환난 전에 교회 휴거가 있다는 것이 핵심 주장이다. 세계 역사를 일곱 천년 세대로 나눈 이유는 일곱 번째 천년 세대인 천년왕국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세대주의 신학은 구원의 역사에서 유대인 구원을 중시하고 종말의 임박성을 강조한다.
세대주의의 종말론은 한국 교회의 통속적인 종말론의 뿌리가 되어 휴거가 중시되면서 시한부 종말론 이단이 나타났다. 그러나 정통 세대주의 신학자 중 시한부 종말론자는 없다. 시한부 종말론은 한국판 예수 점쟁이들이 자기 환상과 계시에 근거해 재림 날과 때를 예언한 것이지 세대주의 신학의 가르침은 아니다. 성경은 구체적인 종말 시간표를 제시하지 않고 종말의 징조만 언급하며 종말의 때를 준비하라고 도전한다.
사람들은 종말의 날 자체에 관심이 크지만 예수님은 종말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에 대해 더 관심이 있으시다. 요즘 자연재해의 빈도수가 많아지고 재해 강도도 커지고 있다. 인간을 위한 자연 개발이 인간을 향한 자연 반란을 초래하고 있다. 인간다움과 성도다움이 약해지고 자기 우상화도 심화되고 있다. 그것들도 종말의 징조다. 그런 시대의 징조를 잘 분별하고 말씀과 기도를 가까이하며 살라.
2. 하나님의 품으로 피하라
본문 21절에 언급된 산으로 도망가라는 말씀이 구체적으로 어떤 산으로 도망가라는 말씀인지 혹은 어떤 비유인지 명쾌하게 알 수 없다. 그 말씀은 하나님께 피하라는 상징적인 표현일 수도 있다. 이단 교주는 자신이 특정한 피난처를 알고 제공해줄 것처럼 미혹하지만 그런 교주에게 몰려가면 하나님과는 더 멀어진다. 이 땅에 영원한 피난처는 없다. 영원한 피난처는 하나님의 품이다. 삶의 위기를 느끼면 사람을 찾아 의지하기보다 더욱 하나님을 찾아 의지하고 말씀과 가까워지라.
종말이 가까워졌다는 인식은 같아도 바른 교회와 이단 교회의 대응 방법은 다르다. 이단은 자기 공동체가 도피처라면서 세상을 배타하게 만들고 사람과의 장벽을 쌓게 해서 세상 소식을 차단한다. 그래야 영혼 통제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또한 이성과 의식을 잃도록 다양한 방법을 쓴다. 감정을 고조시키는 악기 소리, 신비한 소리, 이상한 목소리, 환상 연출 등으로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어 자기 공동체에 몰입시키고 세상과 사람과 사회를 배타하게 만들기에 이단에 빠지면 점차 사회성을 잃는다.
이단은 믿음과 영성 행위를 엄격하게 규정해서 그 범주 안에 들어온 사람만 선택된 백성이라고 세뇌한다. 그리고 그 세뇌가 먹히도록 사회성을 떨어뜨리고 공동체 윤리를 배타하며 정체를 숨긴다. 투명성과 개방성이 없는 공동체는 지극히 주의하라. 만약 어떤 공동체가 처음에 자기 정체를 감추고 나를 미혹한 사실을 나중에라도 알았다면 즉시 그 공동체에서 빠져나오라. 선행을 할 때만 은밀히 해야지 정체성 자체를 은밀히 감추는 잠행 단체는 거의 이단성이 있다.
이단은 대부분 폐쇄적이다. 심지어는 가족에게도 정체를 숨기게 하거나 가족까지도 배타하게 한다. 가족관계와 가정을 무너뜨려야 자기 공동체에 영혼을 붙잡아 두고 부려먹기 쉽기 때문이다. 또한 이단 교주는 종말의 임박성을 강조해 감정을 사로잡고 이성을 잃게 만든 후 자신을 포기하라고 극단적인 헌신을 강조한다. 그래서 몸과 물질을 빼앗는다. 그렇게 이단에게 미혹되어 평생 모은 재산을 잃고 신음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반면에 바른 기독교는 종말의 임박성을 인식시키면서도 이성을 잃지 않게 만들고 영혼을 자기 품이 아닌 하나님의 품으로 이끈다. 그처럼 종말 징조를 인식하면서도 희망을 더 크게 인식함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히거나 불안에 빠지지 말라. 또한 하나님 안에서 심령의 대 자유를 만끽하며 밝게 살고 도피하는 삶이 아닌 참여하는 삶을 통해 어두운 세상을 변화시키고 땀을 앞세워 세상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려고 하라.
3. 용기를 내고 일어서라
마지막 때에는 전쟁뿐만 아니라 전 지구촌적인 재앙이 있을 것이다(22-26절). 그러다가 때가 되면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실 것이다(27절). 그런 최종적인 결말을 알기에 절망 중에도 희망을 잃지 말라. 예수님의 재림 징조가 나타나면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 있게 일어서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라(28절). 마지막 때는 고통하는 때가 되어 사람들이 자기와 돈을 사랑하고 자랑과 교만과 비방이 넘치게 된다(딤후 3:1-2). 그처럼 인간(human being)이 인간다움(being human)을 잃은 모습에 실망하지 말고 그럴수록 더욱 일어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행동으로 보이라.
히브리서 12장 1-2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이 세상은 경기장과 같고 나는 경주자와 같고 먼저 천국에 간 성도들은 천국 스탠드의 관중과 같다. 예수님을 목표로 믿음의 경주를 하며 힘들 때마다 천국 스탠드에서 응원하는 천국 관중을 생각하며 힘을 내라.
하늘 스탠드에서 다윗은 이렇게 응원할 것이다. “지금 골리앗과 같은 문제 가운데 있어도 염려하지 말게. 내가 골리앗을 이긴 것처럼 너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네.” 에스더는 이렇게 응원할 것이다. “어려울수록 힘내세요. 그때를 위해 당신이 그곳에 있게 되었어요.” 먼저 천국에 간 부모는 이렇게 응원할 것이다. “계속 전진해라. 너는 꿈을 이룰 수 있다. 나는 너를 믿는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격려하실 것이다. “네가 참 자랑스럽구나. 이제 일어서서 내가 기뻐하는 성도로서 사회 변화의 주체가 되라.”
나는 혼자만의 경주자가 아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 하늘에서 응원하고 있다. 힘든 현실로 인해 낙심하지 말라. 지금도 늦지 않았다. 용기 있게 일어나 다시 새롭게 시작하면 얼마든지 역전 인생을 쓸 수 있다. 하나님은 늘 제2의 기회를 주신다. 인생은 시작보다 마무리가 중요하다. 비전을 향해 나아가다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라. 내 앞에 찬란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용서하면 그때부터 새로운 시작이 주어지고 이전보다 더 큰 축복이 준비될 수 있다. 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절망적인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세상이 어둡고 장벽이 높아도 계속 고백하라.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상황을 잘 통제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그런 믿음의 고백이 속박을 끊고 장벽을 무너뜨린다. 믿음 안에서는 절망도 더 나은 것을 위한 희망의 서곡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지 말라. “저는 이제 끝났습니다. 좋은 기회를 다 날리고 나이도 많은데 더 이상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죽어버린 꿈도 얼마든지 되살려주실 수 있다.
외적으로 내세울 것이 별로 없고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낙심하지 말라. 시대와 상황을 잘 분별하고 용기 있게 일어서서 믿음으로 나아가면 언젠가 찬란한 꿈은 이뤄진다. 학력과 배경과 외모와 자본의 부족함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제한할 수 없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도 하나님께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나는 혼자 경주하지 않고 하나님과 예수님과 수많은 증인이 나를 응원하고 있음을 믿고 다시 힘을 내고 일어어서 종말의 순간을 찬란한 시작으로 만드는 멋진 천국 성도가 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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