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말씀 : 마태복음 24장 32-42절
32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3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35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 주의 재림을 예비하는 길 >
어느 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주님! 세상 끝 날에는 어떤 징조가 있습니까?” 그때 예수님은 거짓 그리스도의 미혹과 난리, 전쟁, 기근, 지진이 곳곳에서 생기는 것이 말세의 시작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4:5-8). 지금 세계 곳곳에서 들려오는 각종 흉문이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때일수록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눈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며 종말의 때를 대비해야 한다. 종말을 잘 준비하고 주의 재림을 예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종말이 가까운 줄 알라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의 국목이나 국화는 아니지만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다. 본문 32절의 “무화과나무가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알라.”라는 말씀을 이스라엘이 독립하면 종말이 가까운 줄 알라는 말씀으로 해석하면 본문 33절의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보면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진 줄 알라는 말씀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가까이 곧’이라는 표현은 어느 정도의 시간을 뜻하는가?
본문 34절을 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이 말씀에서 ‘이 세대’가 문자적으로는 ‘예수님 당시의 세대’를 뜻하지만 문제는 인류의 종말과 주님의 재림이 예수님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없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구절은 유대교와 이슬람교가 예수님의 신성과 무오류를 부인하며 예수님을 실패한 선지자로 격하시키는 호재로 사용하는 구절이다.
20세기 후반의 많은 종말론 교주들은 ‘이 세대’를 ‘1948년에 이스라엘이 독립한 후 한 세대’를 뜻하는 표현이라고 주장하며 ‘임박한 종말론 열풍’을 일으켜 영혼 사냥에 나섰다. 즉 1970년대에는 한 세대를 30년쯤이라고 주장하며 종말론 열풍을 일으켰고 1980년대에는 한 세대를 40년쯤이라고 주장하며 종말론 열풍을 일으켰고 1990년대에는 한 세대를 50년쯤이라고 주장하며 종말론 열풍을 일으켰다.
아마 2030년대에는 한 세대를 한 사람의 평균 수명인 90년쯤이라고 주장하며 임박한 종말을 내세워 영혼을 미혹하는 교주가 등장할 것이고 2040년대에는 한 세대를 100년이라고 주장하며 임박한 종말을 내세워 영혼을 미혹하는 교주가 등장할 것이다. 성경을 자기 주관대로 해석해서 임박한 종말을 내세워 불안감과 두려움을 심은 후 영혼을 사냥하는 교주들의 종교 장사는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왜 예수님은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라는 말씀을 주셨는가? 후세 사람들이 정확한 종말 시기를 알아맞힐 단서로 삼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종말 의식을 가지고 늘 깨어서 종말과 재림을 대비하며 살라는 의미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대’란 표현이 정확히 어느 때인지를 알아내려는 시도는 사실상 불필요하다. 그런 시도를 하고 어떤 견해를 펼수록 더 오류에 빠진다.
역사적으로 종말 시기에 대한 예언이나 해석은 다 틀렸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기 주관대로 종말 시기를 예언하거나 해석한 사람들의 시도가 틀린 것이지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35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36절).”
전지하신 예수님이 종말 시기에 대해 “아들도 모르고”라고 하신 역설적인 말씀은 “나도 모른다는데 네가 안다고 하지 말라.”라는 뜻으로써 종말 시기를 예언하는 교주에 대한 경고의 의미도 있고 그런 교주를 결코 따르지 말라는 경계의 의미도 있다. 인류의 종말과 주님의 재림 날짜는 아무도 모른다. 종말과 재림 날짜를 맞추겠다고 특정한 사람들은 다 이단 교주로 판명 났다. 그처럼 종말 시기를 알려고 하지 않아도 종말이 가까워졌다는 의식만은 가지고 살라. 지금 세상을 보면 종말이 가까워졌음을 실감한다.
고대에 언어가 하나일 때 사람은 바벨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해서 사람의 이름을 내고 흩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언어를 혼잡하게 만들어 소통 부재로 사람들을 흩어지게 하셨다. 그런데 요즘 인공 지능 기술의 발달로 바벨탑 사건 이전 시대처럼 언어 소통의 하나화가 급속히 진행 중이다. 그런 현실도 인류가 다시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에 빠져 종말을 맞이할 전조다. 그처럼 종말이 가까운 줄 알라.
2. 깨어서 종말을 준비하라
예수님이 말세의 징조를 말씀해 주셨어도 정확한 재림 날짜를 비밀로 붙이신 것은 항상 깨어서 준비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뜻일 것이다. 그처럼 종말을 준비하는 삶의 중요성을 일깨우시려고 예수님은 노아의 홍수 때를 예로 들어 말씀하셨다. 즉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를 준비할 때 사람들은 아무도 홍수를 대비하지 않고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면서 세상 쾌락을 추구하다가 결국 대 홍수로 다 멸절했는데 인류의 종말과 주님의 재림도 그런 패턴을 따를 것이라는 말씀이다(37-39절).
종말 때는 사람들이 밭에 있든지 맷돌질 할 때든지 준비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버려둠을 당한다(40-41절).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42절).” 언젠가 예수님은 도둑처럼 은밀하게 사람의 생각을 초월해서 재림하실 것이다(44절).
주님의 재림을 잘 준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세상 욕심을 버리고 천국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욕심은 가치관과 관련이 깊다. 예를 들어 개는 금덩이보다 뼈다귀를 더 좋아한다. 옛 성현들은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했는데 개들은 모두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한다. 개들이 도가 튼 도사견들이어서가 아니라 황금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욕심을 극복하려면 이전에 욕심을 내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새로 찾으면 된다.
오래 전에 한 어린 조카가 군것질을 위해 삼촌에게 1,000원을 달라고 했다. 삼촌이 장난으로 100원을 주자 조카는 100원짜리 동전을 내버리고 1,000원짜리 지폐를 달라고 졸랐다. 어리지만 1,000원짜리 지폐와 비교해서 100원짜리 동전을 가치 없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처럼 1,000원짜리 지폐를 얻기 위해 100원짜리 동전을 버리기는 쉽다. 그때 100원짜리 동전에 대한 욕심을 버리겠다고 철야기도나 금식기도를 할 필요가 없다.
사도 바울은 왜 이전에 자랑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는가? 예수님을 얻기 위해서라고 했다(빌 3:8). 배설물에 욕심을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처럼 이전에 욕심내던 것들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하면 이전의 욕심내던 것들은 배설물처럼 버리기가 쉽다. 결국 나를 돼지우리로 몰아내던 욕심을 극복하려면 감춰진 천국 보화를 발견하고 고상한 천국 지식을 가지는 길밖에 없다. 믿음이 이성적이고 감정적인 믿음으로만 끝나면 안 된다. 천국 가치관을 얻고 이 땅의 것에 대한 욕심을 극복하는 믿음이 참된 믿음이다.
3.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라
현재 내가 누리는 복은 저절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앞선 누군가의 희생의 결과였다. 그 사실을 깨닫고 미래의 누군가를 위해 나도 내 몫의 희생을 다짐해야 한다. 세상과 사람으로부터 피해를 많이 봤어도 너무 피해의식을 가지지 말라. 피해의식을 가지면 작은 일에도 상처를 받고 화를 내면서 점차 사람으로부터 멀어지고 복으로부터도 멀어진다. 피해의식을 희생의식으로 승화시키라. 피해의식을 느낄 때마다 희생의식을 다짐하면 점차 착하고 충성된 종의 삶을 살면서 복된 역사가 나타날 것이다.
마지막 때는 인간성 상실의 시대다. 그런 시대임을 느낄수록 더욱 인간성 회복에 앞장서서 천국 확장에 힘쓰라. 특히 성도는 남을 증오하도록 부추기면 안 된다. 어떤 목사는 동성애를 지극히 반대하지만 동성애자를 증오하도록 부추기지는 않는다. 사람을 증오하도록 부추기면 성도 자격이 없고 목사 자격은 더욱 없다. 인간성 상실의 시대에 목사와 성도는 의로운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인간성 회복을 선도해야 한다. 특히 사람을 세뇌시켜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거짓 교주는 힘써 멀리해야 한다.
거짓 교주를 어떻게 분별하는가? 네 가지를 보면 된다. 첫째, 거짓말을 하도록 부추기는지를 보면 된다. 둘째, 누군가를 증오하도록 부추기는지를 보면 된다. 셋째, 불안감과 두려움을 부추기는지를 보면 된다. 넷째, 말씀을 외면한 계시와 체험 신앙을 부추기는지를 보면 된다. 네 가지 중 하나라도 있으면 안 되는데 심지어는 그 네 가지를 다 가지고 있는 사악한 교주도 있다. 문제는 그런 사악한 교주를 광신자들은 더 따른다는 것이다.
종말을 내세워 사람들의 마음에 불안감과 두려움을 심고 신비 체험이나 특별 계시를 내세워 약해진 영혼을 미혹하면 그 교주가 아무리 화려한 약속을 해도 결코 따르지 말라.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는 특별한 은혜를 받고 특별한 선택을 받았다는 생각은 교만에 빠진 증거라고 했다. 결국 교만할수록 광신자가 될 확률은 커진다. 종말 신앙이 광신이 되지 않도록 영성 자랑을 삼가고 자신의 현실 속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넘치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주의 재림을 예비하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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