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말씀 : 누가복음 7장 11-15절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 예수님을 만나 동행하라 >
어느 날 예수님이 갈릴리 지방의 주 활동무대인 가버나움의 남서쪽으로 약 40km 떨어진 나인 성에 갔다(11절). 성문에 가까이 이를 때 한 장례 행렬을 만났는데 그때 많은 사람들이 한 과부의 죽은 독자를 메고 나왔다(12절). 당시 비참한 과부의 처지에서 마지막 소망이던 독자의 죽음이 그녀에게 큰 상심을 주었을 것이다. 누가는 ‘독자’와 ‘과부’란 단어를 통해 그녀의 참담한 심정을 잘 묘사했다.
그때 많은 성 사람들이 장례 행렬에 동참해서 그나마 작은 위안은 있었겠지만 그것으로 과부의 큰 슬픔을 달랠 수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때 과부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이다.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고 많은 사람들과 동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동행이 무엇인가? 너무 늦게 가지도 않고 너무 빨리 가지도 않는 것이다. 일할 때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적당히 하는 것도 중요하다. 사람들은 적당히 하는 것을 ‘적당주의’란 딱지를 붙여 나쁘게 여기고 심지어는 죄처럼 여긴다. 그러나 눈치 보며 자기 할 일을 외면하는 ‘게으르고 얍삽한 적당’은 나쁜 것이지만 한문의 뜻 그대로 ‘적절(適切)하고 합당(合當)한 적당(適當)’은 나쁜 것이 아니다.
어떤 목사는 교회가 침체되니까 부흥을 목표로 40일 금식기도를 한다. 그 후유증으로 죽은 목사가 한두 명이 아니다. 그런 목사에게 꼭 필요한 거의 진리와 같은 교훈이 바로 “적당히 하라.”는 교훈이다. 금식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자기 비우기’인데 목표에 대한 강한 집념으로 금식의 기본 목적까지 망각해 금식이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뜻을 앞세우는 ‘자기 채우기’가 되면 믿음도 잃고 건강도 잃고 심하면 죽는다. 소낙비 은혜만 추구하지 말라. 비전을 살리고 영혼을 살찌우는 것은 오히려 이슬비 은혜다.
< 초월적인 영성을 가지라 >
예수님은 장례 행렬의 과부를 보고 불쌍히 여겨 울지 말라고 하셨다(13절). 과부의 슬픔에 깊은 동정과 연민을 느끼신 것이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실 때 항상 그 밑바탕에는 동정과 연민이 있었다. 긍휼한 마음은 기적의 중요한 통로다. 어떤 자칭 능력자는 체육관 집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들이민 머리를 실로폰 채로 도레미파솔라시도 치듯이 손으로 장난처럼 툭툭 치면서 안수한다. 거기서 참된 능력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차라리 나무 위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이 낫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신 “울지 말라.”는 말씀은 의례적이고 값싼 위로가 아니었다. 값싼 위로는 아무런 위로도 주지 못한다. 값싼 위로를 줄 바에는 차라리 그냥 울게 놔두는 게 낫다. 깊은 슬픔을 당한 자에게 충고처럼 들리는 위로의 말을 너무 쉽게 하지 말고 먼저 깊은 공감의 감정을 가지고 말보다는 따뜻한 사랑의 손길로 상대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라. 그런 조용한 사랑의 터치가 많은 말의 위로보다 더 중요하다.
그때 예수님은 죽은 청년의 관에 사랑의 터치를 하셨다. 구약 율법에 의하면 죽은 자의 관에 손이 닿으면 부정하게 여겨졌다(레 22:4; 민 19:11).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율법을 초월해서 주저 없이 자신을 부정하게 만드셨다. 그 사랑의 터치로 과부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처럼 여기며 긍휼한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셨다. 그때 관을 메고 가던 이들이 예수님의 뜻밖의 행위에 놀라 걸음을 멈추자 예수님이 말씀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영성이 무엇인가? 세상과 현실을 극복하게 하는 초월적인 힘이다. 오늘날 가장 필요한 힘인 초월적인 영성은 죽은 자에게 마치 산 것처럼 “청년아! 일어나라.”라고 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릴 때도 사람들은 야이로의 딸을 죽었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잔다고 하셨다. 그처럼 죽은 것을 보고 잔다고 하는 것도 바로 초월적인 영성이다. 상식과 지식을 따라 살지 않고 진리와 진실을 따라 사는 초월적인 영성을 가질 때 죽었던 꿈과 비전이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할 것이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기억하고 싶은 말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비로운 하나님 Our Compassionate God (1) | 2021.01.14 |
---|---|
유혹에 약한 사람 (0) | 2021.01.14 |
당신의 노래는 무엇입니까? What's Your Song? (0) | 2021.01.13 |
신앙 성숙도의 기준 (0) | 2021.01.13 |
[온라인새벽기도] 비판과 정죄를 삼가라 (0) | 2021.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