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고 싶은 말들
[온라인새벽기도] 표적보다 말씀을 추구하십시오
by manga0713
2017. 9. 25.
[이미지출처: 한국일보, "나치 수용소서 거짓말같은 사랑, 진짜 거짓말이었다"]
본문말씀 : 누가복음 11장 27-32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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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28.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29.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30.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31.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32.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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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보다 말씀을 추구하십시오 (누가복음 11장 27-32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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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짓된 삶의 추락은 필연입니다 >
1939년 폴란드 태생의 유대인 헤르만 로젠블라트는 10살 때 나치가 세운 유대인 게토에 엄마와 세 형과 함께 갇혔습니다. 아빠는 전쟁 직전에 병사했고 엄마는 그가 12살 때 독가스 시설을 갖춘 트레블링카 수용소로 이감되었습니다. 당시 여성과 노약자는 대부분 트레블링카로 끌려갔고 노동력이 있는 사람만 살아남았습니다. 그와 형들은 1944년 7월 쉴리벤 인근의 부헨발트 수용소로 이감돼 강제노동을 했습니다. 거기서 한 천사 소녀를 만났습니다.
어느 날, 시신을 소각로로 옮긴 후 잠깐 쉴 때 철조망 주변을 걷다가 담장 너머 버드나무에 몸을 숨긴 채 자신을 바라보던 한 소녀를 보았습니다. 소녀는 재킷에서 사과를 꺼내 울타리 너머로 던져주었습니다. 그 후에도 가끔 빵이나 과일 등 먹을 것을 가져왔습니다. 두 살 아래의 유대인인 그녀는 가족과 함께 신분을 감춘 채 근처 가톨릭 시설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애틋한 사랑을 나눌 때 그녀는 그의 희망이었습니다.
1945년 2월, 체코에 있는 수용소로 이감되면서 서로 이름도 모른 채 헤어졌고 얼마 후 종전과 함께 풀려났습니다. 그는 영국으로 건너가 4년간 재활 기술학교에서 전기 기술을 익혔고 1950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이듬해 미군에 입대해 한국전에 참전했고 1953년에는 뉴욕에서 가전제품 수리 점을 열었습니다. 1957년, 친구 소개로 한 여인을 만나 대화하다가 그녀가 자신의 희망이었던 천사 소녀임을 알고 즉시 청혼해 결혼했습니다.
그 사랑 얘기는 1992년 처음 공개했습니다. 그해 그의 가게에 무장 강도가 들어 그와 아들이 총에 맞아 아들은 장애인이 되고 자신도 입원했습니다. 입원 중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참혹했던 수용소 시절의 기억을 잊으려고 그 전까지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던 자신의 사랑 얘기를 세상에 알리라고 해서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여러 언론을 통해 그의 사랑 얘기는 널리 퍼졌고 1996년에는 오프라 윈프리 쇼에도 출연해 그의 사연이 미국과 전 세계로 퍼졌습니다. 그 후 자서전 출판계약과 영화사 판권계약을 맺었고 여러 집회에 초빙되어 자신의 애틋한 사랑 얘기로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결혼 50주년인 2007년에는 윈프리 쇼에 또 출연해 아내에게 반지를 끼워주며 변함없는 사랑을 고백하자 윈프리는 22년 방송 경험 중 가장 위대한 사랑을 봤다고 띄워주었습니다.
거짓말 같은 그 사랑 얘기는 실제로 거짓말이었습니다. 그 거짓은 처음에는 큰 악의 없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수용소의 참담한 기억에 작은 사랑 얘기 하나쯤 픽션으로 끼워 넣어 남다른 수용소 체험담으로 주목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욕망이 빚은 작은 거짓이 점차 커지며 세상을 속인 것입니다. 그처럼 거짓된 사랑 얘기를 진짜로 믿는 세상의 환호를 즐기면서 그는 계속 간증하듯이 자기 사연을 말하고 강사비도 두둑이 챙기면서 점차 자신도 그 거짓을 진짜처럼 믿어버리는 거짓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 거짓이 처음에는 통했지만 점차 진실을 아는 사람에게도 그 얘기가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부헨발트 수용소 생존자들과 그의 형제들은 그 얘기를 불신했어도 대부분 침묵했습니다. 당시 수용소 상황을 생각하면 믿기 힘들다는 인터넷 글들도 있었지만 대놓고 어깃장을 놓아 감동하는 세상에 찬물을 끼얹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점잖고 상냥한 노인이 그런 거짓말을 하고 더 나아가 부부가 같이 그런 거짓말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2007년 홀로코스트 사학자인 켄 왈츠가 부헨발트 수용소에 관한 책을 쓰면서 생존자 인터뷰를 한 후 수용소의 철조망, 외곽 도로 등의 구조를 보면 로젠블라트와 천사 소녀의 지속적인 만남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당시 외부와 연결된 유일한 도로는 독일군이 완전 봉쇄했고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은 24시간 감시체제였으며 당시 그의 아내는 수용소에서 340km나 떨어진 곳에 살았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또한 1945년 5월 10일 오전 10시에 가스실로 보내질 운명이었는데 그 2시간 전에 연합군의 진주로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는 자서전 내용도 가짜였습니다. 나치는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내며 사전에 고지한 예가 없었고 당시 수용소의 관리는 독일의 항복 전인 5월 초부터 국제적십자사로 이관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거짓을 고백한 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증오 대신 사랑과 인내의 중요성을 알리고 싶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내와의 인연은 제 상상 속에서는 진실이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그녀가 거기서 제게 사과를 던져줬다고 믿습니다.” 얼마나 황당한 말입니까? 그때 켄 왈츠가 말했습니다. “홀로코스트의 어두운 진실을 달콤한 사랑 얘기로 감추는 것은 홀로코스트의 죄악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생존자들의 참된 기억의 가치를 훼손하고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이들을 돕는 죄악이다.”
그 후 출판사는 판권계약을 해지했습니다. 사소하게 시작했다가 거대해진 거짓말로 세상과 자신을 속인 그의 말년은 유년의 죽음의 수용소보다 더 참혹했습니다. 가족들은 관계를 끊었고 자녀들도 아버지를 대외 활동을 막았고 죽을 때까지 마이애미의 한 낡은 아파트에서 아내와 칩거하며 살다가 2015년에 85세로 죽었습니다. 언뜻 보면 화려한 거짓이 소박한 진실을 이기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거짓말쟁이는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지만 거짓된 삶의 추락은 필연으로서 오직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 이단에게 미혹되지 마십시오 >
로젠블라트 사건은 사람과 사회가 거짓말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정신이 병든 사람이나 거짓된 사람이 내놓은 허구적인 얘기나 치유나 기적을 합리적 의심도 없이 탐닉해 자기도 망치고 남도 망치고 사회도 망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합리적인 의심만 조금 해도 거짓은 빛을 보지 못합니다. 조금만 조사하면 금방 드러날 거짓을 그토록 널리 통용시킨 사회의 허술함을 비판만 하고 끝내면 안 됩니다. 그런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 거짓된 기적과 치유와 약속에 미혹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성도는 더 진실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순수하게 간증하다가 간증할수록 감동적인 사연이 은근히 덧붙여져서 점차 거짓과 과장이 될 때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간증으로 유명해진 한 집사는 더 이상을 간증을 다니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간증할수록 자기기만에 빠질 위험성을 알고 스스로 자제한 것입니다. 양식 있는 사람은 그렇게 자제하지만 영혼을 자기 노예로 만들려는 거짓 종교인은 자제는커녕 계속해서 거짓말로 영혼을 미혹합니다.
지난 주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에서 한 여자가 목사를 사칭하며 사기 행각을 벌이는 방송이 나왔습니다. 봉침으로 치유해준다면서 유명한 남자의 은밀한 곳에 봉침을 놓고 사진을 찍은 후에 협박해서 거액을 뜯었습니다. 미혼모로 몇 명의 아이를 입양해 키운다고 ‘한국의 마더 테레사’라고 선전하면서 후원금을 착복했습니다. 게다가 2015년에 기독교로 개종하고 바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는 전형적인 가짜 꽃뱀 목사인데 사회자는 방송 내내 ‘목사’란 명칭을 써주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이단 교주들은 거짓 치유나 종말 약속 등을 내세워 영혼을 미혹합니다. 반면에 대부분의 진실한 목회자는 소박하게 교회를 섬기며 어렵게 삽니다. 언론에 거짓 종교인 얘기가 보도되면 거짓 종교인은 삶 자체가 거짓이니까 그런 보도를 개의치 않고 여전히 거짓을 행하며 건재하지만 진실한 목회자는 더 어려워집니다. 목회자에게 완벽함을 요구하지는 않더라도 미혹자의 거짓말은 잘 분별하고 걸러내어 자신을 지키십시오. 대박 축복에 너무 목매지 말고 진실한 삶을 살면서 땀을 흘리면 조만간 축복의 때가 찾아옵니다.
큰돈을 벌어준다는 미혹에 빠져 몇십 년 모은 돈을 다 날리고 천국의 특별한 선택과 자리를 보장해준다는 미혹에 빠져 소중한 가정이 깨지면 얼마나 씻기 힘든 상처가 됩니까? 이단에 미혹되면 몇십 년간 쌓은 헌신과 행복의 탑이 단번에 무너집니다. 성경적인 성공이란 외적인 성공이나 내면의 행복 이상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면 인생에서 거의 성공한 것과 다름없고 이단의 미혹에 넘어가지만 않는다면 인생에서 절반은 성공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이단 경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 말씀을 듣고 지키는 복 >
예수님께서 놀라운 진리의 말씀을 전하자 무리 중 한 여자가 소리 높여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27절). 그 말은 “당신은 특별한 선택과 복을 받은 분입니다.”라는 찬사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찬사에 대해 반응하지 않고 참된 복의 실체에 대해 말씀하며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이 복이라고 했습니다(28절). 그만큼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듣고 지킨다는 것의 핵심 의미가 무엇입니까? 요나의 표적을 가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악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말씀하신 후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29절). 요나의 표적이란 요나가 물고기 배에서 사흘간 있다가 입으로 토해져서 살아난 기적입니다. 그 표적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사흘 만에 무덤을 헤치고 살아날 기적이 미리 예고된 표적입니다.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이 니느웨 사람들을 회개시킨 것처럼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가 회개와 변화의 원천이 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30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믿음을 고백하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계속 성숙해져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는 경지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때 부활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십자가를 지면서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으면 어떤 환경에서도 변화의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이 잘 이해되도록 예수님은 솔로몬과 요나와 비교해서 스스로를 크신 분으로 묘사했습니다(31-32절).
표적을 보고 감탄할 때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킬 때 인생이 달라지고 세상이 변화됩니다. 그 사실을 외면하고 기적을 보거나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을 따르면 달라지는 줄 알기에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거짓말로라도 기적과 신비를 꾸며내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사탄과 이단이 침투하고 거짓말로 물질과 명예를 취하려는 로젠블라트 같은 사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헛된 믿음으로 표적을 추구하지 말고 참된 믿음으로 표적이 따라오게 하십시오. 표적이 따라오게 하려면 표적에 감탄하지 말고 말씀에 감탄하십시오.
< 표적보다 말씀을 추구하십시오 >
본문에서는 ‘악한 세대’라고만 표현되어 있지만 병행 본문인 마태복음 12장 39절에서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조금 더 상세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왜 기적을 구하는 것이 악하고 음란합니까? 마음이 동기가 자기 유익에만 몰두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표적 신앙은 복권 신앙과 유사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과 사명과 말씀을 자기 뜻과 이익과 생각보다 앞세워야 합니다. 그것이 없이 자기 유익만을 위해 겉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하는 것은 악하고 음란한 것입니다.
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까? 출애굽은 했지만 광야에서 미래가 암담했고 너무 살기 어려웠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모세까지 시내산에 올라가 40일 동안 내려오지 않으니까 불안함을 달래려고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한 것입니다. 그들은 겉으로 하나님을 섬겼지만 기적적인 축복만 준다면 금송아지도 좋다고 한 것입니다.
기적만 준다면 우상숭배도 좋고 미신이나 신비주의도 좋다면서 잘못된 기적 집회를 찾아다니는 것은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모습입니다. 병을 낫게 해주고 특별한 구원과 선택을 보증한다는 달콤한 말과 함께 표적을 내세우는 곳으로 몰려가는 것은 불행의 구덩이로 추락하는 지름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께 몰려온 많은 무리들은 말씀을 듣기 위해서나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적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물리치신 것입니다.
거짓 축복과 표적에 미혹되지 말라는 것이 예수님의 당부입니다. 표적을 바라기보다 솔로몬이나 요나의 말보다 더 위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려고 하십시오. 복의 핵심 내용은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입니다. 그때 진짜 복과 기적과 표적이 따라옵니다. 불안할수록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일에 몰두하십시오. 경제가 어렵고 병들고 사업이 어렵고 사회가 혼란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집중하십시오.
기적과 말씀 중 어느 것을 붙들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말씀의 진리가 너무 중요하기에 예수님은 본문 말씀 전에 귀신을 쫓는 것에 대한 <귀신 청소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한 더러운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 들어갔다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갈 곳이 없어서 옛날에 자기가 사로잡았던 사람의 마음을 보니까 깨끗이 청소되어 있어서 잘됐다고 여기고 일곱 귀신을 데리고 들어가서 그의 형편이 처음보다 나중이 더 어려워졌다는 비유입니다.
예수님이 왜 그 비유를 주셨습니까? 빈 마음이나 중립적인 마음은 없다는 뜻입니다. 귀신이 순간적으로 나간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것이 없다면 빈 마음에 이전보다 더욱 더럽고 강력한 귀신들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귀신을 일시적으로 쫓아내는 외적인 모습에 너무 매달리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귀신 청소 비유>는 귀신을 쫓아낸다는 집회가 얼마나 허무한 것이고 사탄과 이단이 이용도구가 잘 될 수 있는지를 경고하는 비유입니다.
기적적인 체험을 해도 말씀을 듣고 지키지 않으면 얼마 후에는 일반인보다 더 못난 모습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기적에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오. 성도의 본질적인 삶은 믿음을 바탕으로 말씀에 순종하고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삶입니다.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하나님!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 환경이 바뀌지 않아도 늘 말씀 붙들고 은혜 가운데 살겠습니다. 인생과 사업과 진로에 손해가 되어도 하나님 말씀을 힘써 지키겠습니다.” 그런 참된 믿음을 통해 참된 기적의 주인공이 되고 인물 성도의 삶을 예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