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선생님의 "흑산"은 이 땅에 천주교가 조용히 들어와 조용히 퍼져 나갈 때, 시끄럽게 죽이고 조용히 죽음을 맞이해 가는 사람들이 섞여 있는 그 때와 그 사람들을 주인공으로하는 소설 입니다.
부족한 자의 눈으로는 김훈 선생님의 역사소설들은 전면에 내세우는 이순신이나 우륵이나 산성의 벼슬아치들의 모습만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아 내지만 살아 있었다는 기록이 전혀 없는 우리네를 주인공으로 합니다.
"흑산"에도 원래 그들의 속에 있었던 것 같이 쉽게 받아 들여지고 살아갈 힘이 되었던, 교리라고 하는 그 무언가를 받아 들이고 익히고 기대하며 기다리고 살아가는 천주교인들이 우리네의 모습으로 나옵니다. 선생께서 독자를 생각하시어 하나 둘 익숙한 이름을 붙여주고 주인공 삼으신 것이지요.
기독교인인 나는, 신앙을 품은 죽음(순교)은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결기 굳음에서 나오는 것이라 세뇌아닌 세뇌되어 있습니다.
책의 한 대목처럼,
"정약종은 하늘을 우러르며 웃으면서 칼을 받았다. 도성 쪽으로 날이 저물고 서강 쪽 하늘에 노을이 번져 있었다. 그의 웃음은 평화로웠고 큰 상을 받는 자의 기쁨으로 피어나 있었다."
신앙인의 죽음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기 속에서 피어나는 자연스런 스데반의 미소인 줄 만 알았던 것이지요.
"흑산"에서 김훈 선생은 교인들의 죽음은 신앙인으로서의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님을 죽은 자와 죽는 자, 죽이는 자와 죽임을 허락하는 자, 곁에 선자와 곁에 산자들의 얽힌 시간으로 채워 내신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어두웠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일종의 간증서와 같이 자랑스런 무언가를 기대했던 어리석음도 있었지만, 더 큰 것은 이 놈의 죽음 때문이었습니다. 이 놈의 곁에 선 자의 곁에 삼 때문이었습니다.
"흑산"은 그 속에서 가장 작은 자의 가장 큰 삼, 생명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지요. 길에 대한 다음의 이야기처럼요..^^
"길은 늘 앞으로 뻗어 있어서 지나온 길들은 쉽게 잊혔지만, 돌아올 때는 지나온 길이 앞으로 뻗었고, 갈 때 앞으로 뻗어 있던 길이 다시 잊혔다. 길은 늘 그 위를 디뎌서 가는 사람의 것이었고 가는 동안만의 것이어서 가고 나면 길의 기억은 가물거려서 돌이켜 생각하기 어려웠다."
꼭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다음은 이 책을 읽다가 밑줄 친 말들 입니다.
- 정약종은 하늘을 우러르며 웃으면서 칼을 받았다. 도성 쪽으로 날이 저물고 서강 쪽 하늘에 노을이 번져 있었다. 그의 웃음은 평화로웠고 큰 상을 받는 자의 기쁨으로 피어나 있었다.
- 모든 매는 각자의 매였는데, 그랬기 때문에 매는 더욱 육신에 사무쳤다. 그 캄캄한 단절은 신의 부재 증명이었지만, 다시 캄캄하게 뒤집히는 고통이 생명을 증거하는 사태는 신의 존재 증명인 듯도 했다.
- 길은 늘 앞으로 뻗어 있어서 지나온 길들은 쉽게 잊혔지만, 돌아올 때는 지나온 길이 앞으로 뻗었고, 갈 때 앞으로 뻗어 있던 길이 다시 잊혔다. 길은 늘 그 위를 디뎌서 가는 사람의 것이었고 가는 동안만의 것이어서 가고 나면 길의 기억은 가물거려서 돌이켜 생각하기 어려웠다.
- 섬에도 민물에는 민물 것이 삽니다. 자리가 있으면 사는 게 있지요.
- 아이들을 가르칠 때, 억지로 키우려고 공들이지 말고 스스로 되도록 공들여야 한다. 키워서 길러내는 것은 스스로됨만 못하다.
- 무너져야 할 것이 무너지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의 가장 큰 무서움이었다. 썩은 것들이 오히려 강력하고 완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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