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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박완서, 마지막 소설집] 기나긴 하루

by manga0713 2012. 2. 25.



일상의 일탈을 위해 잠시 도망쳐 나온 시간. 도망치긴 했어도 갈 곳은 딱히 없는 발걸음은 역시나 서점으로 인도됐는데....

입구에서부터 쫙 깔려 있는 박완서 선생님의 책들이 발길을 묶어 놓았지요. 사실 핸드폰에 저장해 놓은 모 교수의 책을 내친김에 다 사서 읽어야겠다는 결의가 충천했었는데....

하릴없이 왔다 갔다 갈등아닌 갈등을 하다가 다시금 선생님을 추념하며 작품들과 묶음집들을 모아 놓은 매대에서 또 한참을 그렇게 하릴없는 갈등을 했습니다.

이 것도 읽고 싶고 저 것도 읽어야 겠고
이 이야기도 들어야 하고 저 이야기도 들어야 하고
이 추억의 맛도 좋았고 저 추억의 맛도 좋았고
이 시대의 가족도 내 가족이고 저 시대의 가족도 내 가족이고

역시 "마지막 소설집"이라는 강렬함이 이기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의 그 어떤 이야기가 나를 사로잡지 못하겠습니까. 모든 이야기가 마치 친할머니처럼, 친엄마처럼 조곤조곤 속삭이는 듯한 작은 목소리이지만 그 어떤 블록버스터보다도 강렬하고 실제적으로 나를 휘감아 천당에도 가게 하고 지옥에도 가게 하고 하늘을 날게도 하고 까마득한 두려움에 떨게도 하는 살아있는 이야기요 삶 자체이지요.

그렇게 사랑하게된 선생님과 선생님의 이야기. 그 끝. "마지막 소설집". 그래서 "기나긴 하루"인가...

이 책은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빨갱이 바이러스',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 요렇게 세 편의 단편과 김윤식 선생의 추천 '카메라와 워커'와 그의 회상, 신경숙님이 추천한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과 그녀의 회상, '닮은 방들'과 이 글을 뽑은 김애란님의 회상, 마지막으로 신형철님의 해설이 하나의 책으로 묶여 있습니다.

신경숙님의 회상 글 중에 나오는 한 도막을 보면,

"선생님 책을 만들어본 적이 있는 그 사람이 그러더군요. 교정을 보다가 어느 한 문장을 들어내보려고 하면 그 아래뿐 아니라 저 아래, 저 아래 문장까지 한 뭉텅이가 쓸모없는 문장이 되어버리는 경험을 처음 했었다구요. 속으로 '박완서가 쓴 문장을 왜 들어내려고 했을까?' 의아했지만 그 사람의 다음 말에 더 묻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박완서는 얼핏 이야기꾼 같지만 사실은 문장 속에 박완서 정신의 핵이 들어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 문장을 들어낸다고 그렇게 전체가 와르르 무너지려고 하겠냐면서요."

저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의 살아 온 시간들. 그 안을 채워 온 순간들.
오늘의 어느 한 순간을 들어내고
어제의 어느 한 순간을 들어내고
일년의 어느 한 순간을 들어내고
지금까지의 어느 한 때를 들어낸다고 해서

들어내어진 것들은 온전히 나의 시간들이 아니었다고 부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들어내고 픈 그 순간들, 보여주고 픈 그 순간들 그 모든 순간들과 때들이 온전히 나의 삶의 사실들인 것이지요.

그랬습니다.
박완서 선생은 살아 온 모든 날들 그 어느 순간, 그 어느 때들도 온전히 당신의 삶의 사실들임을 숨기지 아니하고 그 때의 모든 마음의 이야기 시간의 더깨들을 조곤조곤 이야기 해 주셨지요.

채워져 온 자신의 삶을 사랑하며 나누며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선생의 마지막 소설집을 덮으며 또 저는 그렇게 나의 삶의 사실들을 인정하고 긍정하며 하늘을 바라봅니다.

기나긴 하루 (양장)
국내도서>소설
저자 : 박완서
출판 : 문학동네 2012.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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