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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싶은 말들

[온라인새벽기도] 방언의 유익과 폐해

by manga0713 2023. 1. 9.

[ 페르난도 보테르 : The Fisrst Lady ]

 

 

본문말씀 : 고린도전서 14장 1-6절

 

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 방언의 유익 >

 방언의 은사는 어떤 유익이 있는가? 첫째, 하나님과의 교제를 깊게 만든다. 본문 2절을 보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방언은 하나님과 영적인 비밀스런 교제를 이루게 한다. 요즘 신세대 말 중에는 알 수 없는 은어가 많다. “당근이야.”라는 말은 “당연해.”라는 말이다. 그런 은어들로 그들만의 깊은 동류의식을 강화시키듯이 방언을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이룰 수 있다.

 둘째, 자기의 덕을 세우게 한다. 본문 4절을 보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물론 이 말씀은 ‘자기의 덕’을 세우는 방언보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 예언의 우월성을 언급한 말씀이다. 그래도 방언이 자기의 덕을 세우는 유익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방언을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 위로와 평강과 지혜와 명철이 넘치면 점차 성숙해진다.

 셋째, 자신과 공동체의 기도를 돕는다. 방언으로 기도하면 기도가 더 잘 되고 생활화되기 쉽다. 뚜렷한 문장으로 이뤄진 기도를 하면 간절함이 덜 나타나고 자기 생각과 지식과 언어 체계가 개입되어 기도의 자연스러움이 저하된다. 또한 그 기도 내용이 자신의 귀로 전달되고 머리로 인식되면 기도를 논리적이고 멋지게 하려는 욕심이 생기면서 참된 기도가 저해되지만 방언으로 기도하면 그런 폐단이 줄어든다.

 또한 지혜로운 방언 기도는 공동체의 기도를 돕는다. 방언 기도에는 두 종류가 있다. 속으로 중얼거리듯이 조용히 하는 방언 기도와 겉으로 소리치며 큰 소리로 하는 방언 기도다. 특히 누군가가 소리 내어 방언 기도를 하면 기도 열기가 뜨거워진다. 짐승소리 같은 기괴한 소리를 내거나 너무 큰소리로 방언 기도를 해서 남의 기도를 방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적절하고 지혜로운 방언 기도는 대개 기도의 열기를 뜨겁게 만든다.

< 방언의 폐해를 막는 길 >

 방언은 여러 유익을 주지만 고린도교회에서는 방언으로 유익보다 폐해가 더 컸다. 방언을 하는 교인들이 방언을 영성의 증표로 오해해서 영적 우월감을 가지고 다른 교인을 깔보고 교회 리더를 우습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방언의 폐해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사랑의 은사를 추구하라

 바울은 신령한 은사를 추구하고 사모하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권면했다. 특히 예언의 은사를 권면했다(1절). 그것은 방언의 은사가 최고가 아니라는 분명한 교훈이다. 왜 사람들이 방언의 은사를 오용하는가? 방언을 신비한 말을 하는 것으로만 여기기 때문이다. 방언의 은사가 내포한 더 깊은 의미는 ‘언어의 변화’와 ‘영혼의 소통’에 있다. 실제로 성령 충만하게 되면 말부터 배려하는 소통적인 말로 변화된다.

 방언의 은사가 도전하는 변화와 소통이란 개념을 간과하기에 오히려 방언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그처럼 은사 문제로 인해 교회에 문제가 생기니까 어떤 사람은 ‘은사’라는 말만 나와도 거부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바울은 은사의 폐해가 있다고 해서 은사를 부정하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교회의 유익과 복음 전파를 위해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다. 그리고 은사를 사모할 때는 사랑을 추구하며 사모하라고 했다(1절). 즉 은사를 추구하는 동기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남이 어떤 은사를 가지고 있으니까 나도 가지고 싶다는 마음으로 추구하거나 영성을 자랑하려고 추구하면 은사는 유익이 되기보다 해가 된다. 사람의 자랑하고 싶어 하는 본능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자랑하는 사람을 보면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느껴지기보다 오히려 더 짓눌려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자랑과 과시욕에 마음이 지배되지 않게 하라. 자랑하는 태도는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나타낸다. 자랑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돌아보려는 마음을 가질 때 희망도 커진다.

 은사를 추구하는 동기가 자랑이 아닌 사랑이 되게 하라. 은사를 추구할 때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나님! 제가 교회에서 교사 직분을 맡았습니다. 그 직분을 잘 감당하도록 지식의 은사를 주소서. 하나님! 제가 이번에 권사가 되었습니다. 그 직분을 잘 감당하도록 섬김과 위로의 은사를 주소서.” 그처럼 사랑을 따라 은사를 추구할 때 성령님은 어떤 직분과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적절한 은사를 넘치게 주실 것이다.

2.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

 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멸시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교회에 덕을 세우고 복된 교회 생활을 위해서는 방언의 은사보다 예언의 은사를 더 중시하라고 했다(4-5절). 예언의 일반적인 뜻은 ‘앞날의 일을 말하는 것’이지만 성경적인 예언은 앞날의 일을 말하거나 점치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서 말하는 신령한 예언자나 선지자는 용한 점쟁이가 아니다. 성경적인 예언은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음을 인정하고 주어진 현실에서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

 구약의 예언서는 토정비결이나 정감록처럼 미래 일에 대한 예언들로 가득 차 있지 않다. 물론 경고의 의미에서 미래의 징조를 예언한 부분도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내용이 당시의 불신과 불의와 우상숭배를 지적하고 미래의 심판을 경고하면서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내용이다. 즉 성경적인 예언은 ‘미래와 관련된 점술’의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 ‘현실과 관련된 선포’의 의미를 가진 것이다.

 예언 기도를 해 준다는 사람을 지극히 조심하라. 사람은 미래의 일을 알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다. 그 본능이 하나님의 진노를 낳는 통로가 될 수 있다. 미래를 점치고 싶어 하는 것은 불안한 마음이 노출된 가장 불신적인 태도다. 참된 성도는 내일 일을 잘 아는 성도가 아니라 내일 일을 잘 맡기는 성도다.

 미래를 알려고 하지 말고 미래를 맡기려고 하라. 미래에 대한 지나친 호기심은 사탄의 미혹에 빠지게 만든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분복대로 살려고 하라. 하나님께 맡길 것은 온전히 맡기는 것이 신앙의 묘미다. 하나님께 속한 것까지 다 알려고 하면 참된 예배자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만큼만 알려고 하라. 사람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분수를 지킬 때다. 무엇이 복인가? 하나님이 감춰두신 것을 알아채는 특별한 지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분수를 지키고 하나님의 뜻을 묵묵히 따르는 것이다.

3. 남의 유익을 생각하라

 방언의 은사는 기도 사역과 관련이 깊다. 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것이기에 남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 기도를 하는 것이 해가 되지 않고 오히려 유익이 된다. 왜 방언 기도가 개인의 기도 생활에 도움이 되는가? 하나님께 탄원하는 것도 기도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기도인데 방언 기도를 하면 탄원 기도 때보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비교적 잘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언어로 기도하면 대개 탄원에 기도의 초점이 맞춰져 있기에 하나님의 음성이 잘 들리지 않지만 깊은 침묵 가운데 기도하거나 방언 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음성이 비교적 잘 들린다. 어떻게 보면 방언 기도는 깊은 침묵 기도와 간절한 탄원 기도의 중간쯤 되는 기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처럼 방언 기도는 개인의 기도 생활과 영성 관리에 유익이 되지만 영성을 과시하려고 하는 방언은 유익이 되지 않는다(6절). 내게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남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면 절제해야 복된 교회생활이 이뤄진다.

 남을 유익하게 하려면 좀 더 장성해지라. 아이는 남을 생각하지 않지만 어른은 남을 생각한다. 영성이 깊은 것처럼 보여도 남을 배려하지 않으면 미성숙한 것이다. 또한 아이는 돈을 쓰기만 하고 벌지 못하지만 어른은 돈을 벌어 가정을 꾸려간다. 그처럼 미성숙한 성도는 남을 위해 기도하거나 돌보거나 헌신할 줄 모르지만 장성한 성도는 전도도 하고 봉사도 하고 헌신도 한다. 영성을 추구하는 것은 좋지만 혼자에게만 좋은 영성은 사실상 좋은 영성이 아니다.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참된 영성을 앞세워 교회생활에서 많은 열매를 맺으며 살라.

 교회에서는 물론 사회에서도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 작은 사람이나 없는 사람을 경시하지 말라. 사람에게 살갑게 대한다면서 사람을 쉽게 여기거나 농담을 함부로 하지 말라. 공동체를 재미있게 해 주려고 유머를 쓸 때도 사람을 비하하는 유머를 쓰지 않도록 타인 감수성을 발휘하라. 살가운 행동도 상대를 진심으로 존중하는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상대는 그 행동을 요즘의 미투(me too) 상황처럼 기분 나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이단 교주는 처음에는 매우 살갑다. 그러다가 관계가 깊어지면 이단 교주에게 교인은 주머니의 장난감, 요구하면 들어주는 자판기, 시키는 대로 하는 셔틀, 그리고 필요를 채우는 현금 인출기처럼 된다. 처음에 살갑게 다가왔다가 ‘영혼까지 털어먹는’ 영털 이단 교주에게 속지 말라. 앞에서 살갑게 행동하고 뒤에서 비하하면서 하나님과 사람을 배반하지 말라. 처음부터 너무 살갑고 가까운 척 하면 오히려 실망 가능성이 커진다. 오랜 세월을 통해 진면목을 알면서 더 살가워지는 영성과 인간관계를 추구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교회를 잘 섬기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