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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싶은 말들

[온라인새벽기도] 성령님이 임하실 때

by manga0713 2019. 9. 23.

 

 

 

 

본문말씀 : 사도행전 2장 1-4절

1.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성령님이 임하실 때 (사도행전 2장 1-4절)

< 싸움에 휘말리지 말라 >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이 불구경과 싸움 구경이라고 한다. 교회에서도 싸움이 생기면 처음에는 출석률이 높아진다. 그러다가 오랜 싸움에 지치면 점차 출석률이 떨어지면서 나중에는 교인 숫자도 줄어든다. 교단 회의에서도 중요한 선거나 현안 문제로 다툼이 생기면 총회 참석률이 높아진다. 사람의 내면에는 남의 싸움을 즐기는 본능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일은 전쟁이다. 그 전쟁이 남의 나라에서 벌어지면 그것을 보고 즐기는 악한 본능이 있다. 또한 전쟁은 전쟁 당사자는 폐허로 만들지만 전쟁을 피한 인접국은 오히려 경제가 활성화되는 특수를 누린다. 세계 대전에서의 패배로 다 죽어가던 일본이 한국 전쟁으로 엄청난 군수물자의 후방 병참 국가로 초대형 특수를 누려서 그때 한국은 완전히 짓밟혔지만 일본은 완전히 살아났다. 그렇게 이웃 나라의 불행을 통한 나라 발전보다 국민들의 창조성과 성실성을 통한 나라 발전을 꿈꿔야 한다.

 싸움을 보며 즐기는 본능을 잘 조절해야 내 영혼과 정신을 지킬 수 있다. 언론은 진실을 알리는 기능을 하지만 불을 지르고 싸움을 만들려는 속성에 유혹받기도 쉽다. 불구경과 싸움구경을 좋아하는 사람 심리에 편승하면 독자와 시청자와 구독자를 더 얻기 때문이다. 물론 싸움을 붙이는 글을 보고 말을 들어도 내 영혼과 정신을 잘 지키면 내 행복과 축복과 몸의 건강도 지킬 수 있지만 그런 말과 글에 내 영혼과 정신을 팔면 내면이 황폐해지고 건강도 잃기 쉽다. 잘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듣는 것도 중요하다.

 몇 년 전에 탄핵 정국 때 유튜브 개인방송을 듣고 깜짝 놀랐다. 욕 비슷한 말과 비속어가 난무하면서 옛날의 저질 부흥회가 연상되었다. 옳은 말도 저질로 했다. 그때 귀를 잘 지켜서 듣는 것도 잘 듣겠다고 다짐했다. 개인 유튜브 저질 방송을 들으면 카타르시스도 느끼고 듣는 쾌락에 이끌려 더 듣지만 그러면서 점차 영혼에 성령님이 임할 공간이 줄어든다. 그 말들을 글로 기록해서 다시 보면 “내가 이런 말을 듣고 빠졌나?”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회의할 때 회의록을 작성하면 대개 말을 조심한다. 자기가 한 말이 회의록에 남기 때문이다. 내 행동뿐만이 아니라 내 말도 하늘에 기록되고 있다고 여기고 재미가 덜하고 임팩트가 적어도 영원히 그 기록이 남아도 좋을 말을 하고 그런 말을 많이 들으라. 욕, 정죄, 교만한 어투의 말은 최대한 삼가라. 기록에 남기기에 부끄러운 말은 가급적이면 하지도 말고 듣지도 말라. 그것이 내 영혼과 정신도 지키고 몸의 건강도 지키는 길이다.

 얼마 전에 A 성도가 40도가 넘는 고열로 며칠간 시달렸다. 그 성도는 자기 몸이 그렇게 아팠던 것이 자기 통제를 벗어난 분노 때문이라고 스스로 성찰했다. 최근에 몇몇 유튜브 뉴스를 밤잠을 설치고 들으면서 정치와 시사 문제로 인한 분노가 생겼다. 리얼한 표현으로 분노를 유발하는 것에 자꾸만 끌려서 더 들었는데 앓고 난 후에 생각했다. “내가 분노를 통제 못한 것도 이번에 심하게 앓은 원인인 것 같다.” 그때부터 자극적이고 쾌락적인 말로 자꾸 듣고 싶도록 만드는 유튜브 뉴스를 멀리하자고 결심했다.

 좋은 것을 많이 들으라. 불의에 대해 의분을 가질 때도 그 의분이 나를 태울 정도까지 되게 하지는 말라. 만약 필자가 의를 내세워 교인들의 분노를 일으키는 식으로 목회했다면 아마 몇 번쯤 장례를 치렀을 것이다. 지난 목회 27년 기간 중 교인 장례를 한번도 치르지 않은 것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십자가의 신앙을 내세워 외적인 평화와 내적인 평안을 끊임없이 도전했기 때문이다. 교회에 천국 평화와 천국 평안이 넘치는 것은 축복 중의 축복이다.

< 성령님이 임하실 때 >

 요새도 가끔 성도가 수치스런 일에 연루된 보도를 들으면 “어떻게 믿는 사람이 그런가?” 하고 분개한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분개하기 전에 늘 가장 먼저 앞세워야 할 것은 회개다. “하나님! 그 모습이 저의 모습입니다. 저를 도우소서.” 사람은 누구나 악한 일에 연루될 수 있다. 때로는 내게도 악인의 모습이 나올 수 있다. 언제인가? 성령님이 내 삶을 주관하지 못할 때다. 그래서 성령님의 임재만큼 소중한 축복은 없다.

 본문에는 오순절 날 성령님이 임한 사건이 나온다. 그때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고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장면도 있었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모두가 다른 언어들로 말하는 역사가 벌어졌다. 성령 충만의 역사는 성도의 역동적인 삶에 꼭 필요하기에 성도가 가장 사모해야 할 것이다. 어느 때에 성령님이 임하시는가?

1. 기쁨과 즐거움이 있을 때

 본문 1절 전반부를 보라.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오순절은 유월절, 장막절과 함께 유대인의 3대 절기 중 하나다. 유월절은 출애굽의 해방을 기념하면서 쓴 나물과 누룩 없는 맛없는 떡을 먹었기에 썩 즐거운 절기가 아니다. 장막절은 40년 광야생활 때 하나님이 도와주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다. 그때 모든 사람이 집을 떠나 광야에 텐트를 치고 거기서 일주일간 지내면서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 성회도 열었기에 장막절도 역시 썩 즐거운 절기는 아니다.

 유월절과 장막절은 금식과 절식과 고행을 요하는 절기였지만 오순절은 즐겁게 먹고 마시는 절기였다. 그때 사람들은 하나님이 첫 열매를 주신 것을 감사해서 잔치를 벌였다. 성령님이 금식하고 고행하는 유월절이나 장막절에 임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절기인 오순절에 임하신 것은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곳에 성령님이 임하신다는 뜻도 되고 반대로 성령님이 임하신 이유가 기쁨과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라는 뜻도 된다. 주일 예배 후 식사와 교제와 하나님 안에서의 적절한 쉼, 휴가, 누림의 삶 등도 거룩한 삶의 일부임을 잊지 말라.

2. 일치와 화합이 있을 때

 그때 제자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을 때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생겼다(1절). 하나님의 축복과 성령의 역사는 하나 되는 곳에 나타난다. 성경은 마음만 합하면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고 말한다(대하 5:13-14). 서로 힘을 합하는 천국 교회가 되면 그 교인도 잘 되기에 늘 교회적인 마음을 가지라. 하나님은 축복을 주시기 전에 대개 먼저 사람을 보내주신다. 그 보내주신 사람과 힘써 하나 되려고 해야 비전 성취도 가까워진다.

 교회생활을 할 때 성령 안에서 자존심을 죽이는 훈련을 힘써 하라. 자존심을 지키고 축복을 잃기보다 자존심을 버리고 축복을 얻으라. 자존심을 죽이고 일치와 화합을 추구해야 하나님의 축복도 임한다. 반면에 마귀는 일치와 화합을 통한 축복과 능력을 잘 알기에 어떻게든지 그 일치와 화합을 깨려고 한다. 어떤 말이든지 교회에 마음이 멀어지게 하는 말은 일단 주의해 들으라. 사람 개인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사탄의 개입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치하고 화합하려고 해야 하나님은 내 편이 되어주신다.
 
3. 자기의 의지를 버릴 때

 본문에 언급된 ‘홀연히, 임하여, 충만함’이란 단어들은 오순절 사건이 성령님에 의해 주도되고 제자들의 기대를 초월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물론 제자들도 성령을 기다렸지만 성령의 역사가 이렇게 생소하고 예기치 않게 나타날 줄은 몰랐다. 성령님은 사람의 기대와 생각을 초월해 임하신다. 또한 오순절 성령 사건이 사람의 뜻과 의지가 아닌 성령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사실은 사람마다 성령 체험이 다양하게 주어질 수 있다는 암시다.

 나의 체험을 신앙생활의 기준으로 삼지 말라. 사람마다 다른 상황에서 다른 방법으로 가장 적절하게 펼쳐주시는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라. 어떤 사람은 자기 기준을 내세워 “내가 이렇게 은혜 받았으니까 남도 빨리 이렇게 은혜 받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 좋은 마음이 자칫 잘못하면 교회에 어려움을 낳는다. 성령님을 기대하고 겸허하게 말씀과 기도를 앞세워 살면 남들처럼 손의 떨림이 없고 등줄기에서 전율이 흐르지 않고 입신 상태에서 넘어지지 않아도 사람의 기대와 상상을 초월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다.

4. 입술이 온전히 붙들릴 때

 무리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자 그들의 입술이 성령님에게 붙들려 다른 언어로 말했다(4절). 오순절 날의 방언은 성령의 역사는 입술의 붙들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암시다. 성령의 역사와 반대적인 개념의 사건이 바벨탑 사건이다. 그때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은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했다. 그런 교만한 태도로 인해 하나님이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다. 그때부터 소통이 막혀 사방으로 흩어졌다. 결국 혀가 자기 마음대로 놀려지는 것은 최대 저주이고 혀가 성령님께 붙잡히는 것은 최대 축복이다.

 오순절 날의 방언은 성령의 역사로 혀가 붙들려서 듣는 자와 말하는 자의 의사가 소통되는 역사가 이뤄진 방언으로서 고린도전서 14장에 언급된 고린도교회를 휩쓸었던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소리를 내는 방언과는 속성이 달랐다. 천사의 방언을 많이 해도 의사소통이 막히면 참된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오순절 교회의 가장 큰 특징은 말씀을 통한 소통의 역사가 이뤄지는 것이다. 결국 성령충만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내 마음 속에 받아들여지는 것이고 오순절 교회란 남의 말이 내 귀에 아름답게 들리고 내 말이 남의 귀에 아름답게 들리는 천국 교회다.

< 성령충만의 목적 >

 사람이 성령 충만하게 되려면 2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혀가 붙들리는 것’이다. 칭찬하는 말, 위로하는 말, 세워주는 말 등을 절제 있게 하는 혀를 가지라. 또 하나는 ‘귀가 붙들리는 것’이다. 사람이기에 가끔 언어에 실수가 있고 상대의 언어스타일이 나와 다를 수 있고 그가 말하는 뜻이 내게 달리 전달될 수 있다. 그러므로 들을 때 잘 분별해서 선하게 듣고 넉넉한 마음으로 반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혀가 붙들리는 것’과 ‘귀가 붙들리는 것’은 사실상 같다. 혀가 붙들리면 대개 귀도 붙들리고 혀가 붙들리지 않으면 대개 귀도 붙들리지 않는다. 남에게 말로 상처를 잘 주는 사람은 대개 남의 말에 대해 오해도 잘한다. 그러므로 혀와 귀를 동시에 잘 붙잡아 성령충만한 삶을 나타내라. 흔히 오순절 교회를 순복음 교회와 동일시하지만 그렇지 않다. 말씀이 온전히 내 마음에 역사해 말씀대로 살려는 삶과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려는 삶이 있는 교회가 참된 오순절 교회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교회는 오순절 교회가 되어야 한다.

 왜 성령충만이 있게 되었는가? 축복을 더 받기 위해서나 영성이 높다고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명을 더 잘 이행하기 위해서였다. 성령충만의 궁극적인 목적은 영혼 구원과 영혼 변화에 있어야 한다. 오순절 사건은 특별한 사람만이 아닌 모두가 성령 충만함을 받았다. 그때 방언을 120명이 했는데 수천 명이 자기네 언어로 들었다는 말은 오순절 사건이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도록 도전하는 초자연적인 사건이었다는 암시다. 늘 말씀을 기쁘게 받고 말씀대로 살고 소통에 탁월해지고 복음 전파에 힘씀으로 성령 충만하게 사는 복된 심령이 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