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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싶은 말들

[온라인새벽기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

by manga0713 2019. 11. 4.

 

 

 

 

본문말씀 : 창세기 41장 14-16절

14.이에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내 놓은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의 옷을 갈아 입고 바로에게 들어가니 15.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 16.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 (창세기 41장 14-16절)

< 기록하면 마음이 풀린다 >

 요새 자영업자의 눈물소리가 많이 들린다. 노동청 신고를 악용하는 점원에 의해 업주가 시달리면서 점원을 두기 두렵다고 하소연하는 자영업자도 많다. 노동자의 권리 보장은 필요하지만 갑자기 출근을 안 하거나 근무 태만으로 가게에 피해를 입하고 그만 둔 점원이 노동청에 신고할 때도 노동청이 무조건 점원 편에 서서 일처리를 하니까 노동청에서 몇 번 소환 통보를 받은 업주는 점차 마음이 메말라진다. 사랑과 정의의 균형이 중요하다.

 고용인은 일한 만큼 받고 고용주는 일한 만큼 주는 것이 기본 정의다. 갈이 살려고 하고 열심히 살려고 하라. 회사에 다닐 때는 고용주만 갑질의 주체인 줄 알던 사람이 퇴사 후 자영업을 하면서 고용인도 갑질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깨달을 때도 많다. 좋은 고용주는 장사가 잘되면 고용인을 잘 대우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장사도 힘든데 잘못된 고용인을 만나 노동청에 몇 번 소환 통보를 받다 보면 한숨도 커지고 마음도 메말라진다.

 최근에 한 자영업자가 말했다. “요즘처럼 불경기에 누가 직원들 벌어 먹이려고 대출받고 거래처 가서 굽신거리며 자영업을 하겠습니까? 고용주가 무조건 갑인 시대는 갔고 고용인이 갑일 때도 많습니다. 가게 운영에 지장을 주는 고용인의 권리까지 무조건 인정해주면 고용주는 어디에 하소연합니까?” 기본적으로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더 받고 더 대접받고 더 고용이 잘되는 세상이 의로운 세상이다.

 일전에 한 자영업자가 월요일에 직원을 고용했다. 그녀는 화요일에 가정에 일이 생겼다고 오후에 일찍 퇴근했다. 수요일에 출근한 후 아침을 못 먹었다면서 1시간 동안 밥을 먹고 들어왔다. 금요일에 출장 가는데 필요한 자료를 정리해 메일로 보내고 퇴근하라고 했는데 연락이 끊겼다. 결국 다음 주 월요일에 출근했을 때 퇴사를 요구하자 곧 노동청에 퇴직 당했다고 신고했다. 결국 한 달 치 월급을 주라는 노동청 조정을 받고 하소연할 데가 없어 화병이 났다.

 얼마 후 그가 화병으로 위가 아파 지낼 때 자기와 비슷한 사례에 대한 언론 보도가 인터넷에 떴다. 댓글을 읽자 자기와 같은 사례를 가진 사람들이 한을 토로하고 정부를 원망하는 댓글들이 수없이 달려 있었다. 그 글들을 보면서 자기처럼 마음의 고통을 당한 사람이 많음을 알고 화병이 조금 풀렸다. 갑자기 자기 사연을 쓰고 싶어 자기 한을 토로하는 댓글을 길게 달았다. 그러자 신기하게 화병이 더 풀리면서 위도 조금씩 편해졌다.

 기록의 힘은 작은 힘이 아니다. 기록하면 침착해지고 넉넉해진다. 바르고 좋은 기록은 역사가 기억해준다.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좋은 기록을 남겨 역사가 기억하게 하면 억울한 한도 상당히 해소된다. 사람은 어느 때 권력이나 여론에 의해 마녀사냥을 당할 수도 있다. 그때는 항변도 소용없다. 그 억울함을 어떻게 해소하는가? 그때는 역사가 기억해준다는 믿음을 가지고 조용히 기록을 남기라. 그래서 사람이나 역사가 기억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그래도 속상해하지 말라. 하나님은 반드시 기억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40장은 23절에서 이런 말씀으로 끝난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잊어버리자 요셉은 계속 감옥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더 있었는가? 관원장들의 꿈을 해석해준 후 만 2년을 더 있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술 맡은 관원장을 생각할 때마다 울화가 치밀었겠지만 요셉은 편안하게 내일의 소망을 가지고 때를 기다렸다. 마침내 하나님이 애굽 왕 바로의 꿈에 역사하셔서 길이 열리게 하셨다.

<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 >

 어느 날 바로가 두 가지 꿈을 연속해 꾸었다. 첫째 꿈은 나일 강가에 서서 보는데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가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그 뒤에 또 흉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강가에서 올라와 그 아름답고 살진 일곱 소를 먹는 꿈이었다. 둘째 꿈은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그 후에 또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왔는데 그 가는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키는 꿈이었다.

 아침에 바로는 번민하다가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 그의 꿈을 말했지만 아무도 해석하지 못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다. 사람들은 미래를 알고 싶어 하지만 미래를 알려고 하기보다 미래의 약속을 믿으려고 하라. 사람은 감춰진 미래를 알 수 없다. 누군가 미래를 족집게처럼 알려준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하나님은 미래를 비밀에 붙이셨다.

 점쟁이를 찾는 것은 시간낭비와 돈 낭비와 인생낭비다. 미래를 혹시 알아도 미래를 바꿀 수 없다면 실제로 아무 유익이 없다. 반대로 만약 미래를 바꿀 수 있다면 미래를 안다는 것이 사실상 틀린 말이 된다. 자기가 안다는 미래와 다른 미래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미래를 정확히 알면 삶의 모든 신비가 발가벗겨지기에 하나님은 삶의 신비와 기쁨을 만끽하게 하시려고 미래를 모르게 하셨다. 미래를 굳이 알려고 하지 말라. 다만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땀 흘려 준비하면서 미래를 개척하려고 하라.

 어떤 사람은 말한다. “목사님! 성경에도 예언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의 예언은 개인의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이 아니다. 간혹 구속 역사와 관련해 하나님이 미래에 대해 말씀을 주실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성경적인 선지자는 개인의 미래사를 알아맞히는 족집게 점쟁이들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들려주는 사람이다. 미래의 사건을 말하는 것과 미래의 약속을 말하는 것은 크게 다르다. 미래의 사건에 대한 예언은 혼란과 무의미를 낳지만 미래의 약속에 대한 예언적인 말은 영혼에 큰 힘과 위로를 준다.
 
 점술가들과 현인들이 꿈을 해석하지 못해서 계속 바로가 번민에 빠져 있을 때 술 맡은 관원장이 2년 만에 요셉을 생각해내고 요셉 얘기를 하자 바로가 즉시 요셉을 불렀다. 요셉은 곧 수염을 깎고 옷을 갈아입고 바로에게 들어갔다(14절). 결국 요셉은 꿈 해석 후 2년 만에 바로 앞에 섰다. 2년의 고통의 시간은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이 있었기에 바로 앞에 서게 되어 극적인 역전 인생을 새롭게 쓸 수 있었다.

 바로가 요셉에게 말했다.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는 얘기를 들었노라(15절).” 그 말을 듣고 요셉은 잘난 척 하며 자기가 웬만한 꿈은 다 푼다고 과시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요셉은 이단 교주처럼 거짓말과 모사로 잠시 사람을 미혹할 수는 있어도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 것이다. 영성과 능력을 과시하고 광고하고 자랑하는 것처럼 비성경적인 태도는 없다.

 그때 요셉이 대답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16절).” 요셉은 자신에게 꿈을 해석할 능력이 있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해석해 주실 것이라고 했다. 요셉처럼 모든 일에서 자기를 감추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이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를 얻는 비결이다. 꿈 해석뿐만 아니라 모든 문제의 궁극적인 해답은 하나님께 있다. 기도할 때도 하나님의 뜻을 앞세워 기도하라.

 어느 날 자녀 입시를 앞둔 한 성도가 작정기도를 했다. 목회자도 같이 간절히 그의 자녀가 잘 되기를 위해 기도하면서 동시에 시험 때문에 시험 들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도 했다. 어느 날 그 작정기도를 한 성도가 목회자의 염려하는 마음을 읽고 넌지시 목회자를 안심시키는 말을 했다. “목사님! 아이가 좋은 대학 가게 해달라고 집착해서 작정기도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의 마음을 잘 다스리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목회자는 안도감이 생겼다. 그 기도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앞세우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눈앞의 일로 일희일비하지 말라. 그저 하나님이 전체 인생의 해답임을 온전히 믿으라. 사람에게 궁극적인 해답은 없다. 모든 해답이 하나님께 있음을 진심으로 아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참된 믿음을 가지면 잠깐의 후퇴는 있어도 그 후퇴마저 전진을 위한 기회가 된다. 하나님은 성도의 진실한 기도에 잘못된 길로 역사하시지 않는다. 진실한 기도를 통해 합력하여 선이 이뤄지고 최종 선이 예비 됨을 믿으라. 그런 믿음이 없으면 불안해서 자꾸만 꿈이나 예언 같은 것에 의지하다가 결국 영혼의 악순환에 빠진다.

< 말씀을 꼭 붙잡으라 >

 말씀을 꼭 붙잡으라. 꿈 해석도 성경 원리를 바탕으로 하라. 요셉이 바로에게 말했던 ‘편안한 대답’이란 표현은 ‘하나님의 평안’을 뜻한다. 요셉의 꿈 해석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평안’을 지향한다. 하나님이 주신 꿈은 자녀를 불안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에 꿈 때문에 불안에 빠지거나 저주에 매이지 말라. 하나님이 주신 꿈에도 고난의 징조는 있을 수 있지만 고난이 최종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서면 고난을 통해 축복의 길이 열린다는 것이 성도의 꿈의 최종 결론이다. 그처럼 불길한 꿈조차 소망 가운데 믿음으로 해석하라.
 
 꿈을 희망적으로 해석하고 승화시키라. 가끔 암울하고 회색빛처럼 여겨지는 꿈을 꾸어도 두려워하거나 불길하게 여기지 말라. 꿈을 하나님의 저주의 징조로 받아들이는 것은 꿈의 의미를 잘못 받아들인 것이다. 아무리 기분 나쁜 꿈을 꾸었어도 그 꿈이 성도를 저주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는 어떤 저주의 사슬도 능히 끊을 수 있다. 아무리 어려운 고난과 시련이 있고 아무리 불길한 꿈을 꾸었어도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나의 미래는 하나님에 의해 약속된 미래다. 그 미래의 약속을 믿고 소망 가운데 전진하라.

 예전에 집에서 잠깐 꿈을 꾼 후 깼다. 그때 아내가 TV를 보고 있어서 슬쩍 봤는데 바로 전에 꿈에서 본 장면이 TV에서 그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때로는 꿈이 너무 신기할 정도로 맞는다. 가끔 꿈을 통해 무언의 메시지를 받고 신비한 힘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꿈 체험보다 말씀 체험은 영혼에 훨씬 더 큰 힘을 준다. 꿈에 매이면 잠깐의 신비감은 얻어도 든든한 반석과 같은 삶을 살 수 없다. 반면에 말씀에 굳게 서면 든든하게 살 수 있다. 기록된 말씀에 매이는 것은 꿈에 매이는 것보다 인생을 훨씬 든든하게 만든다. 말씀 기록이 최대 신비다.

 만약 필자가 예민한 시사 문제에 대해 어떤 견해를 말하면 반대 견해를 가진 사람이 거칠게 공격할 수 있다. 그러나 동성애 문제 같은 것은 단호하게 틀렸다고 말한다. 그래도 성 감수성이 부족하다거나 이성 감수성이 부족하다고 동성애 옹호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마녀사냥을 하듯이 필자를 공격하지도 않고 공격할 수도 없다. 여론몰이도 겁나지 않다. 그 문제로 인해 필자를 공격하는 것은 결국 성경을 공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목사로서 “성경이 그렇게 말해요.”라고 하면 끝이다. 성경이 받쳐주면 영혼은 가장 든든해지고 담대해진다.

 수천 년 전에 기록된 성경 문서가 최첨단 과학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가장 든든한 영혼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가? 그처럼 영혼에 든든한 기초가 되는 말씀을 붙잡지 않으면 무엇을 붙잡아야 온전해지고 든든해지겠는가? 말씀 중심적인 삶처럼 영혼을 든든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억울할 일을 당하면 내 사정을 기록해보라. 더 나아가 기도하고 헌신하고 교회를 애틋하게 사랑해보라. 그때 하나님은 내 삶과 마음을 기억해주신다. 늘 성경에 약속된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하나님의 평안과 최후 승리를 얻어내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