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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싶은 말들

[오늘의 양식] 부정적인 딱지를 떼십시오

by manga0713 2013. 1. 7.



본문 말씀 : 마태복음 9장 9-17절


(9절)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절)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절)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14절)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5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6절)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17절)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부정적인 딱지를 떼십시오 (마 9:9-17)


< 사람의 가능성은 무한합니다 >

저는 대학교 4학년 때까지 대중 앞에서 말을 잘 못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설교자가 된 것은 제게는 무엇보다 큰 기적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네트영어의 비전을 품고 있습니다. 대개 한국말도 잘하는 사람이 영어도 잘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한국말도 잘 못했던 사람이 네트영어의 비전을 품고 나가니까 얼마나 신기한 얘기입니까? 예수님 안에서는 누구에게나 놀라운 가능성이 있고 현실 극복 능력도 생깁니다.

저는 사춘기 때 2가지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키가 작은 것과 눈이 작은 것이었습니다. 키가 작고 눈이 작은 것이 실생활에는 거의 지장을 주지 않았습니다. 10대 중반에는 매일 만 번 가까이 쉐도우 복싱연습을 했기에 여자 앞에서는 약했어도 남자들끼리 일대 일 싸움에서는 절대 안 졌습니다. 눈이 작아서 뵈는 게 없었기에 깡도 있었습니다. 공부도 꿀리지 않았고, 체력장도 8종목 전체가 만점이었기에 남자 세계에서는 꿀릴 일이 없었습니다.

또한 키가 작고 눈이 작은 것이 도덕성과 윤리성 함양에 전혀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성실함과 의리와 책임감과 배려심도 없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키가 작고 눈이 작은 것이 유일하게 문제가 되는 점은 이성의 주목을 끌지 못하는 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한 가지가 사춘기 때는 큰 문제였기에 콤플렉스도 컸습니다.

외모가 부족해도 눈만 낮추면 얼마든지 좋은 이성 친구를 얻을 수 있지만 자기 주제는 파악하지 못하고 눈만 높아서 항상 퀸카만 노리니까 이성친구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20대 중반이 되면서 외모보다는 다른 측면을 보고 호감을 가지는 이성이 생기면서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점차 사라졌습니다. 결국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살면서 약점 때문에 너무 위축되어 살지 마십시오. 사람의 가능성은 무한합니다. 자신의 콤플렉스가 실제로는 안 가져도 될 콤플렉스인 경우가 많고 나중에 점차 사라질 콤플렉스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한계 안에 갇혀 살지 말고 남을 어떤 한계 안에 가두지도 마십시오. 특히 정죄는 지극히 조심하십시오. 이 세상에 회개 가능성이 전혀 없는 죄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정죄만큼 무서운 죄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가 죄를 지으면 무섭게 질타합니다. 교인인 경우에는 더 그렇습니다. 그러나 자기에게도 그런 유사한 죄 혹 그 이상의 죄가 있는 것은 외면합니다. 교인이 성자입니까? 교인은 의인이 아닌 부족한 죄인이기에 하나님을 찾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인들이 죄 짓고 회개하고 또 죄 짓고 회개한다고 냉소합니다. 그렇다고 죄를 짓고 뉘우칠 마음조차 없는 사람보다 더 악인일까요? 아닙니다. 어떤 죄도 ‘인간의 정죄’보다는 크지 않고 어떤 죄도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크지 않습니다. 가장 치명적인 죄는 ‘정죄’입니다.

< 결단력 있고 겸손한 마태 >

본문에는 세리 마태가 부름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세리는 ‘죄인의 대명사’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마태가 12사도의 일원이 되고 나중에는 마태복음을 쓰는 위대한 사도로서 ‘죄인의 대명사’란 딱지를 떼어내고 ‘죄인의 대역사’를 이룹니다. 그가 어떻게 부름 받습니까? 본문 9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마태를 '레위'란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마태는 자신의 이름을 ‘레위’ 대신 ‘마태’라고 기록했습니다. 레위는 소명 받기 전의 이름이고 마태는 소명 받은 후의 이름입니다. 그처럼 마태가 바뀐 이름으로 자신을 호칭한 것은 철저히 변화된 자신의 신분과 삶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마태가 부름 받은 곳은 갈릴리 지역의 중심도시였던 가버나움의 한 세관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하자 마태는 즉시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는 결단력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같은 장면을 기록한 누가복음에서는 마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기록합니다(눅 5:28). 마태는 남들이 다 탐내는 지위와 물질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지만 자신이 쓴 마태복음에서는 그 기록을 감추고 그냥 좇았다고 기록할 만큼 겸손한 인물이었습니다.

본문 10절에 나오는 예수님이 마태의 집에서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는 장면도 누가복음에서는 “레위가 예수님을 위해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벌였다.”고 기록합니다(눅 5:29). 반면에 마태는 그냥 “예수님이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라고 평범하게 기록합니다. 그는 자화자찬을 하지 않는 겸손한 영성을 가진 음지의 고수였습니다. 그처럼 자신을 감출 줄 아는 사람이 진짜 큰 인물입니다.

왜 마태는 부름 받고 예수님을 위해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벌였을까요? 첫째, 그 잔치는 옛 친구나 동료에게 옛 삶을 확실히 떠나겠다는 것을 공표하는 송별회 성격이 있었을 것입니다. 둘째, 그 잔치에 마태는 동료 세리들을 많이 초청했는데 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셋째, 그 잔치는 복음 사역을 위해 수고하는 예수님과 그 일행을 최고로 대접하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따뜻한 인물이고 감사를 아는 인물입니까?

이틀 전에 이름만 알고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한 온새기 회원으로부터 이런 메일을 받았습니다. “목사님! 지난 한해 정말 감사했습니다. 늘 은혜 받고 감사한 마음이 있어서 작년 초에 목사님 내외분을 성지순례 보내드리고 싶다는 소원을 혼자 은밀하게 품었었습니다. 그런데 사업이 어려워서 결국 실천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대신에 작은 물질을 보내니까 가족과 사역 팀원들이 맛있는 회라도 사드세요.” 그 메일 한 통이 얼마나 힘과 위로와 감동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마태처럼 겸손하고 따뜻하고 받은 은혜에 대해 감사할 줄 알고 대접을 좋아하는 삶은 변화된 성도에게 나타나야 할 제일 성품입니다.

< 원죄보다 정죄가 무섭습니다 >

그 잔치에서 예수님과 제자들과 세리들이 함께 앉아 식사하는 장면을 그려보십시오. 당시로서는 아주 파격적인 장면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11절). “왜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은근히 예수님과 제자 사이를 이간하려는 그 질문을 듣고 예수님은 당시 속담을 인용해 말씀했습니다. “의사는 건강한 자에게는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쓸 데 있다(12절).”

촌철살인과도 같은 정곡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즉 의사가 건강한 자보다는 병든 자에게 필요하듯이 영혼의 의사이신 예수님이 죄인과 함께 있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죄인을 찾지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칭 의인을 찾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죄가 무서운 죄인 것입니다.

본문 13절 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아니라 ‘긍휼이 외면된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잘 안다면서 믿음의 핵심 내용인 사랑과 긍휼을 외면하고 형식에 치우쳐 남을 정죄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조금 더 배워야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부인하고 싶은 얘기지만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창기’나 ‘수도사’나 오십보백보입니다. 만약 수도사가 창기를 손가락질 하면 그때 수도사는 더 큰 죄인이 됩니다. 원죄보다 더 무서운 것이 정죄입니다. 원죄를 가진 인간은 언제나 은혜의 가능성이 있지만 정죄하는 인간은 은혜의 가능성이 크게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은 자신들의 틀에 어긋나면 그를 사탄의 자식처럼 정죄했지만 예수님은 그런 모습을 결코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사랑도 없이 종교 의식만 내세우며 의인인 척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의식보다 사랑과 자비가 우선입니다. 제사는 필요하지만 긍휼과 사랑이 결여된 제사는 허무한 제사입니다. 그 사실을 강조하려고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 것입니다.

< 형식주의를 멀리하십시오 >

그 말씀으로 바리새인들이 할 말이 없게 되었을 때 갑자기 우군인 줄 알았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본문 14절에서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당시 세례 요한은 헤롯을 비판해서 투옥된 상태였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같이 금식해주지 않고 예수님의 일행이 즐겁게 먹고 마시는 점에 대해 섭섭한 마음과 동시에 금식 문제로 자신들의 영적인 우월성을 은근히 내세우려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면 그때는 금식할 것이다(15절).” 즉 신랑 되신 예수님이 함께 있으면 기쁨이 넘치기에 금식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당시 7일간 계속되는 결혼 잔치 때는 금식일이 도중에 있어도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 제자들은 당연히 금식할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형식주의를 경고하는 의미에서 2가지 비유를 들었습니다.

본문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생베’는 ‘한 번도 빤 적이 없는 천’을 뜻합니다. 생베는 물에 빨아 말리면 오그라들기에 생베를 낡은 옷에 대고 기우면 세탁 후에 오그라드는 생베가 낡은 옷을 잡아당겨서 낡은 옷이 더 해어집니다. 이 비유의 핵심 메시지는 구약 의식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듯입니다.

계속해서 본문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낡은 가죽 부대에 새 술을 담아두면 새 술이 발효하면서 신축성이 약해진 낡은 가죽 부대는 터지기에 발효되지 않은 새 술은 새 가죽 부대에 담았습니다.

이 말씀도 구약 의식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구약을 부인한 말씀도 아니고 금식의 유용성을 부인한 말씀도 아닙니다. 다만 금식으로 진리의 기준을 삼으려는 형식주의를 질책한 말씀입니다. 형식은 필요하지만 형식주의는 버려야 합니다. 과거의 것은 죽도록 고수할 것이 아니라 창조적 발전을 위한 밑거름으로 삼아야 합니다. 즉 전통을 계승해서 발전적인 창조를 이뤄내는 삶이 성도의 과제입니다.

고인 물은 썩습니다. 변하지 말아야 할 총론은 고수하되 변해도 되는 각론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창조적으로 발전시켜야 합니다. 특히 과거에 붙은 부정적인 딱지를 잘 떼어내십시오. 이 세상에 축복의 가망성이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이 붙인 과거의 부정적인 딱지에 연연하지 말고 스스로도 부정적인 딱지를 붙이지 마십시오.

< 부정적인 딱지를 떼십시오 >

여호수아 2장을 보면 하나님이 기생 라합을 쓰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느 날,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을 위해 두 명의 정탐을 보냈을 때 라합은 예민한 영적인 촉수로 그들을 숨겨주는 목숨을 건 선택을 했습니다. 그 선택으로 그녀의 가족들은 구원받았고 나중에 그녀의 가문을 통해 보아스가 나왔고, 보아스는 이방여인인 룻과 결혼해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습니다. 창녀가 메시야 가문의 찬란한 일원이 된 것입니다.

인생은 사람이 붙인 딱지대로 펼쳐지지 않고 하나님이 붙인 딱지대로 펼쳐집니다. 사람들은 라합에게 <창녀, 더러운 여자>란 딱지를 붙였지만 하나님은 그녀에게 <선택된 자, 회복된 자, 소중한 걸작>이란 딱지를 붙여주셨습니다. 그처럼 사람이 붙인 딱지를 떼어내고 스스로를 잘못 규정한 생각에서 벗어나면 그의 미래는 얼마든지 찬란하게 펼쳐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군가에 대해 이렇게 비난합니다. “그는 너무 극단적이야. 너무 비판적이야. 너무 돈만 알아.”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선택해서 믿음과 은혜를 주시고 쓰시기를 기뻐합니다. 그런 은혜가 어디서 시작됩니까? 스스로 잘못된 딱지를 떼어내면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나는 안 돼! 나는 못났어! 나는 늙었어! 나는 희망이 없어!”란 잘못된 딱지를 떼어내고 다음과 같은 새로운 딱지를 붙이십시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선택된 존재다! 나는 성공을 위한 충분한 자질이 있다! 조만간 내 때가 온다!”

사무엘상 16장을 보면 사무엘이 왕의 기름을 부으려고 이새를 찾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이새는 막내아들 다윗을 사무엘 앞에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왕재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막내는 너무 어려! 너무 키가 작아!” 다윗은 아버지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했지만 사무엘은 그를 불러내 왕으로 기름 부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고 의외의 사람들을 선택해서 생각을 초월한 방법으로 그를 쓰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각으로 위축되지 말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보십시오.

어느 날,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이 전쟁터로 심부름을 갔습니다. 그때 맏형 엘리압이 말했습니다. “왜 여기까지 왔느냐? 너는 이곳에 올 데가 못 된다.” 기름 부음 받기 전에는 그 말을 이렇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래. 나 같은 사람이 여기 있으면 안 되지. 빨리 돌아가자!” 그러나 그때는 과거의 딱지를 벗고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해 골리앗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물맷돌로 골리앗을 죽이면서 <육적인 거인을 죽인 영적인 거인>이란 새로운 딱지를 받았습니다. 그처럼 성령의 은혜로 과거의 딱지를 벗어내야 인물이 됩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고향 사람들은 옛날의 딱지를 붙이며 말했습니다. “그는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고향에서는 아무런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옛날의 딱지만 생각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사람들은 과거의 나쁜 딱지를 붙이며 멋진 새 일을 방해할 때가 많습니다. “그는 못해. 나는 그의 과거를 다 알아.” 누가 그런 딱지를 붙여도 흔들리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정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과거는 얼마든지 세탁될 수 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으라고 했습니다. 죄인의 대명사였던 세리 마태가 예수님의 12제자 중의 한 명이 되고 마태복음을 저술한 대역사를 이뤘듯이 누구나 과거의 딱지를 벗고 자기 한계를 넘어서 얼마든지 축복된 내일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

살다 보면 인생 전투에서 패배할 때도 있습니다. 패배도 있어야 인생입니다. 그때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특히 실패에 대해서는 절대 환경을 탓하지 마십시오. 어떤 공부 못하는 학생은 핑계가 많습니다. “공부방이 없었어요. 과외를 못했어요.” 그러나 공부방이 없고 과외를 못했어도 일등 하는 학생들도 많습니다. 환경이 나쁘면 환경을 뚫고 나가면 됩니다. 물질은 환경에 동화되지만 사람은 환경을 변화시킵니다. 사람이 되면 됩니다.

어느 날, 한 학생이 학교에서 담배 피다가 선생님한테 걸리자 친구들이 자꾸 유혹해서 피웠다고 변명했습니다. 비겁한 변명입니다. 이 세상에 그런 유혹이 없는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땅에 유혹이 없는 곳은 공동묘지밖에 없습니다. 환경을 핑계하지 말고 실패를 남 탓으로 돌리지 마십시오. 환경이 어려워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고 얼마든지 역전 인생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 “기뻐하고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행복은 환경과 상관이 없습니다. 힘든 환경에서도 기쁘게 사는 삶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현재 재능만 가지고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불행한 환경에서도 결코 자신감을 잃지 말고 자신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저는 눈이 작은 것과 키가 작은 것 때문에 외모의 경쟁력은 아예 포기하고 실력과 책임감으로 인생의 승부를 걸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신학교 다닐 때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여러 백인 여학생들이 호감을 보인 것입니다. 물론 다 신학생들이었기에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 건전한 관계였습니다.

아내도 아는 내용이니까 잠깐 말씀드리면 그 중에 한 여학생은 키가 아주 컸습니다. 그 학생은 등록하려고 신학교에 처음 갔을 때 친절하게 안내해준 여학생이었습니다. 키가 176센티로 엄청나게 컸지만 청순한 느낌을 주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팬암 항공사 부사장이었고 집은 LA 남쪽의 부촌인 란초 팔로스 버디스(Lancho Palos Verdes) 지역의 언덕 위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동부 뉴욕으로 공부하러 온 학생이었습니다.

1990년 가을, 저는 뉴욕을 떠나 총회 참석차 부모님이 사는 로스앤젤레스에 왔다가 그녀와 3일 동안 같이 휴가를 보냈습니다. 첫째 날은 로스앤젤레스 시내, 둘째 날은 유니버설 스튜디오, 셋째 날은 롱비치에서 보냈습니다.

셋째 날 아침에 아버님 차를 타고 롱비치에 있는 그녀의 집으로 가서 거기에 차를 세워놓고 그녀의 올즈모빌 차를 타고 하루 종일 근처의 유명한 곳은 다 돌아다녔습니다. 그때 그녀는 짧은 핫팬츠를 입고 있었는데 롱비치 해변을 같이 거닐 때는 얼마나 다리가 긴지 그녀의 허벅지가 내 어깨까지 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 정도로 키 차이가 나서 남들 보기에 민망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저녁 무렵, 롱비치 인근의 해변 부둣가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서 그녀에게 나의 어떤 점이 좋아보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두 가지 얘기를 들었습니다. 하나는 신학교에서 항상 미소를 짓고 활기차게 사는 것이 좋아보였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는 당시 신학교에 다니던 한인 학생 35명 중에 제가 제일 잘생겼다고 했습니다. 외모에 항상 콤플렉스를 느꼈던 제게는 난생 처음 듣는 복음과도 같은 소리였습니다.

너무 기분이 좋아서 “어느 부분이 제일 좋으냐?”고 묻자 눈이 너무 매력적이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놀리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사춘기 때부터 외모에서 가장 콤플렉스를 느꼈던 부분이 눈이었는데 그 눈이 너무 매력적이란 말을 듣고 하늘을 날 것 같았습니다. 그때부터 눈에 대한 콤플렉스가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물론 저의 눈이 잘생긴 눈은 아니지만 잘생기게 보일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학교 때 얼굴에 거의 미소가 떠나지 않고 항상 활기차게 지낸 편이었기 때문입니다. 1984년 하나님을 깊이 만난 후 나타난 행복한 미소가 외모는 변화시키지 못했어도 인상은 변화시켰습니다. 그처럼 내 마음의 행복은 남의 눈에 거룩한 착시 현상을 일으킵니다.

이제 늦었다고 자신에 대한 가능성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약점 때문에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놀림 받던 눈에 가장 매력적인 눈이 된 것처럼 자신의 약점이 언젠가는 장점이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부정적인 딱지를 떼어내고 지금부터 하나님을 붙잡고 새롭게 출발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나가십시오.

이제 다시 시작하십시오. 실패가 있어도 실패 공포증에는 걸리지 마십시오. 실패가 사람을 실패자로 만들지 않습니다. 진짜 실패자는 ‘실패한 자’가 아니라 ‘실패공포증에 걸린 자’입니다. 그러므로 실패로 인해 영적인 슬럼프에 빠지지 말고 다시 하나님을 굳게 붙잡고 새롭게 출발하십시오.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성도를 하나님이 포기하는 법은 결코 없습니다. 그런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보다 나은 삶을 창조해냄으로 2013년을 인생에서 가장 기억될만한 복된 한해로 만드십시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