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루 만에 회심하지 않았다."라고 그는 말했다.
"우리의 실천적 기독교가 이론적 기독교에 얼마나 많이 처지는지"라며 그는 아쉬워 했다.
"'좋은 운수'를 믿는 내 이교적 태도는 궁지에 몰릴 때마다 항상 튀어나온다."고 그는 고백 했다.
"기독교 국가는 바울과 게바가 전한 것 이외에 또 하나의 복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 복음은 다른 많은 경멸스러운 가르침 가운데서도 특히 '힘이 곧 정의이고, 돈이 바로 그 힘이다'라고 가르치는 복음이다."라며 그는 경고 했다.
그의 모든 말을 통해 "옛 아담의 껍질을 단숨에 벗어 던지는 데 실패"한 '개독교인'이 되어버린 나를 보았다.
다음은 이 책의 밑줄 친 부분이다.
나는 하루 만에 회심하지 않았다.
신들이 늘어나자 한 신의 요구가 다른 신의 요구와 충돌할 때가 곧잘 생겼고, 따라서 많은 신을 만족시켜야 했던 양심적인 영혼이 처한 곤경은 참으로 슬픈 것이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서약
아래에 서명한 S. A. 대학(Sapporo Agricultural College)의 학생들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그를 고백하기를 원하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복된 구세주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감사를 나타내기 위해 모든 기독교의 의무를 참된 충성으로 행하기를 원하며, 그의 왕국을 진전시켜 그의 영광과 죽음으로 베풀어 주신 구원을 널리 선전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이 순간 이후로 하나님의 신실한 제자가 되고, 그의 가르침의 정신과 글을 엄격하게 지키며 살고, 언제든지 적절한 기회가 되면 우리 신앙을 점검받고, 세례를 받아 복음주의 교회에 입회할 것임을 하나님과 서약하고, 서로 서약한다.
1. 우리는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언어로 된 유일한 직접 계시임을 믿으며, 영광스런 미래의 삶을 위한 오류가 없는 완벽하고 유일한 안내서임을 믿는다.
2. 우리는 우리의 자비로운 아버지가 되시고, 공정하고 절대적인 통치자이시며, 우리의 궁극적인 심판관이 되실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는다.
3.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믿음으로 진지하게 회개하는 자는 죄를 용서받고, 이 생을 사는 동안 성령님의 은혜로운 인도를 받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주의 깊은 섭리에 의해 보호받으며, 결국에는 구원받은 거룩한 자들의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이나, 복음의 초대를 거절하는 사람은 모두 자기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을 믿는다.
4.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겪는 모든 변화 속에서도 다음의 계명들을 기억하고 지킬 것을 약속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지성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너는 새겨진 형상이나 아무 피조물의 형상동 섬기지 말라. 주 너의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고, 그 날에는 불필요한 모든 노동을 피하고, 성경 연구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거룩한 삶을 살도록 준비시키는 데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하라.
네 부모와 통치자를 공경하라. 살인, 간음, 혹은 다른 음란한 행위나 도적질을 하지 말며, 속이지 말라. 네 이웃에게 악한 일을 하지 말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우리의 실천적 기독교가 이론적 기독교에 얼마나 많이 처지는지
영적인 생일(세례 일)…이 나라나 다른 나라의 기독교인들 대부부분이, 우리의 썩어질 육체가 이 땅에 출현한 날의 반만큼도 이 영적인 생일을 따뜻한 말과 아름다운 선물로 축하하지 않는 것 같다.
'선택설' ~ 그러나 이 문제는 그냥 그렇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 선택의 교리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성경과 기독교를 포기할 수는 없지 않는가!
말다툼과 교묘하게 암시적인 기도들
하나님의 영원한 율법의 일부로서 안식일이 가지는 본질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안식일을 지켜서 얻게 되는 '실제적인 이득'의 증거를 확실히 보여 주었다.
신자들 사이에서 친구들이나 아는 사람들이 날마다 그리고 매 주 늘어나면서 나의 종교는 감상주의로 급격히 기울어 갔다. 종교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벌이는 잔치는 도를 넘어설 때가 많았고, 우리 주변에 있는 어둠의 세력을 정복하는 중대한 책임에 대해서보다는 기독교 티 파티와 디너 파티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이 더 많아졌다.
옛 아담의 껍질을 단숨에 벗어 던지는 데 실패하자 나는 내 손의 업적을 통해서 위로 받고자 했다. ~ 감상적인 기도 모임과 심리적인 전율을 일으키는 야외 집회도 한 사람의 거지가 그런 모임을 통해 자기 배를 채우지 못한다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가족이 섬기는 신들을 매달 참배하러 갈 때도 길가에 있는 거지에게 실속 있고 알찬 먹거리들을 주곤 했다. 그런데 이제 기독교로 개종하고 나니 우리는 그들에게 빈 말밖에는 줄 것이 없다. 내 영혼아,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가재를 미끼로 하여 도미를 낚을 수 없듯, 속 빈 교리를 나눠 주는 기독교인은 천국에 갈 수 없다.
~ 그러나 내 영혼의 공허는 이와 같은 몇 가지 경험으로 없어지지 않았다. 원래가 공허하기 마련인 '감상적' 기독교가 나의 공허를 그 어느 때보다 크고 두드러지게 했기 때문에 내가 겪어야 할 공허는 더욱 심해졌다.
내가 보지 못하는 곳을 여호와는 보시며,
내가 듣지 못하는 것을 주께서는 들으신다.
아들아 가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나님은 그 곳에서도 너를 도우시리니. [우찌무라 간조의 부친이 아들의 유학을 위해 지은 시]
기독교 국가는 바울과 게바가 전한 것 이외에 또 하나의 복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 복음은 다른 많은 경멸스러운 가르침 가운데서도 특히 '힘이 곧 정의이고, 돈이 바로 그 힘이다'라고 가르치는 복음이다.
다소 역설적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자신을 더 많이 알기 위해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 다른 민족 혹은 다른 나라를 접할 때만큼 자신의 자아가 더 선명히 드러나는 경우는 없다. 다른 세상이 자기 앞에 펼쳐질 때 내적 성찰은 시작된다.
조국을 떠난 사람은 더 이상 개인이 아니다. 그는 자신 속에 그의 민족과 종족을 안고 있다. 그의 말과 행동은 단지 자신의 것만이 아닌 자신의 종족과 민족의 것으로 평가 받는다. ~ 세계는 그를 통해 그의 민족을 알게 된다. 자고로 큰 책임만큼 사람을 견실하게 해 주는 것은 없다.
내가 생각하는 참된 관용은, 자기 자신의 신앙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정직한 신앙을 허용하고 참아 주는 것이다. 진리의 일부는 알 수 있다고 믿으나, 모든 진리를 다 알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 태도야말로 진정한 기독교적 관용의 기초이며, 모든 사람에게 호의를 가지고 평화롭게 대할 수 있는 원천이다.
내가 아는 것까지만 나의 지식이면 진리다. 세상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나 그것은 내 의견이 아니다. 따라서 나는 그것에 대해서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내가 아는 것만 상관하고 더 이상은 상관하지 말자. [일기] ~ 나에게 수용하라고 강요하는 수많은 의견들에 대항해 나 자신을 무장하기 위해서는 내 지식의 범위와 한계를 정해야 했다.
'좋은 운수'를 믿는 내 이교적 태도는 궁지에 몰릴 때마다 항상 튀어나온다.
옷보다는 몸이 중요하듯이, 영혼의 옷인 몸보다는 영혼 자체가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대체 누가, 오렌지 껍질과 그 과육을 분리하는 것처럼 우리의 몸을 영혼과 분리시켰단 말인가? 육체를 통해 영혼에 도달하지 않고 영혼만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을 주실 때는 실질적인 것을 주신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따른 단순한 공론이나, 상상력의 산물인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세상의 바람에도 끄떡없는 참된 실체를 주신다. [일기]
내가 육신에 대해서 죽어 있으면 마귀들은 절대로 공격해 올 수 없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육신(죄)에 대해 죽는' 것은, 죄로 가득한 내 마음을 들여다보아서 될 일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만 가능하다.
~ 이 모든 문제의 핵심은 그리스도이시며, 사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서로 다르기 마련이다. 중요하지 않은 일에는 자유가 있기를!
기독교의 아름다움은 기독교가 하나님이 각 민족에게 주신 모든 독특한 특성을 거룩하게 만들어 준다는 데 있다.
4월 15일 아침 기도
내가 당신 앞에 나아오는 것은 깨끗하거나 순결하고, 사랑스러워서가 아닙니다.
내가 당신 앞에 나아오는 것은 당신에 의해 채워져서, 당신에게 좀 더 진지하게 기도하고, 이 세상을 좀 더 사랑하고, 당신의 말과 진리로 좀 더 많은 가르침을 받기 위함입니다.
당신은 내게 모든 선함과 긍휼과 사랑의 근원이신 당신을 양식으로 삼고, 당신을 소유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순종과 신실함과 순결은 오직 당신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우리 스스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율법에 순종할 것을 명하십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에 의지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무능을 자각함으로써 우리가 당신께로 나아가고 당신을 소유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께로 인도해 가기를 원해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 주님이시여, 나의 전적인 무능과 타락을 인정하고, 당신의 생명으로 채움 받고자 당신 앞에 나옵니다.
나는 부정(不淨)합니다. 나를 정결케 하기를 당신께 기도합니다.
나는 믿음이 없습니다. 내게 믿음을 주옵소서.
당신은 선함 그 자체이시며, 당신이 없으면 나는 어둠일 뿐입니다. 나의 불결함을 보시고 나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시옵소서. 아멘.
기독교인의 기도는 하나님의 특별한 중재로 자신의 욕망을 채워 주기를 바라는 단순한 요청이 아니다. 그것은 참으로 영원하신 성령과의 교제를 통해서, 이미 하나님의 마음 속에 가지고 계신 그 뜻을 우리로 기도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로 드리는 모든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으시며, 아니 들으실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기도는 예언이다.
내 영혼이여, 항상 선한 것을 의도하시는 그 분의 뜻에 그대의 뜻을 맞추어라. 그러면 태양을 멈추게 해서 더 많은 빛과 즐거움을 누리려는 불가능한 기도로 더 이상 씨름하지 않게 될 것이다.
헌신된 영혼은 자기 자신의 성공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는 것만을 기뻐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연구하는 과학 중에서 신학이 아닌 것이 무엇이겠는가?
인류는 한 부분이 다른 부분과 대립되게, 설사 같은 부분이라도 그 속의 한 구역이 또 다른 구역과 대립되게 천막을 세운다.
모든 사람의 삶에는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일종의 패러다임이 있다. ~ 인간의 선택하는 능력(자유 의지)은 이 패러다임에 자신을 맞추라고 있는 것이다.
구원의 철학이야 어떻건 간에 우리의 구원은 이 '앙망'(바라봄)에 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인해 우리가 받은 속죄의 은혜를 통한 구원이 바로 기독교인 것이다. 분명 기독교는 그 이상일 수는 있지만 그 이하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것이 기독교의 정수다.
진리에는 악한 것은 더 악하게 만들고, 선한 것은 더 선하게 만드는 특성이 있다.
기독교 선교는 기독교 자체의 존재 이유다. ~ 그렇다. 기독교는 전파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외부에서의 성장은 언제나 내부의 성장을 의미한다.
어디를 막론하고 세상은 언제나 실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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