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어 이 책의 핵심은 "네 가치를 구성하는 것은 너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택하심이다."라는 문장에 있다.
다음은 이 책의 밑줄 친 부분이다.
- 숨지말고 나오라
우리는 자신에 대한 감정과 태도를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께 투사한다.
하나님이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향해 불가항력의 애정과 긍휼을 품고 계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면 깊은 회심이 필요하다. 우리의 죄와 잘못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런 우리를 사랑하신는 것이다.
영적 삶이란 자신의 상한 자아를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한다.
이렇듯 달아난 노예처럼 우리는 자신의 실상을 피해 달어나거나 거짓 자아를 만들어 낸다. [사이먼 터그웰, 팔복]
안전하게 느낀다는 것은 머릿속애서 살던 삶을 멈추고 가슴으로 내려가 그분이 날 좋아하시고 받아 주심을 느끼는 것이다.
숨은 데서 나오려는 결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 사역에 들어서는 우리의 입단식이다. 반드시 보상이 있다. 우리는 우리를 자유케 하는 진리 안에 서며, 우리를 온전케 하는 실체 속에서 살아간다.
- 거짓 자아
거짓 자아는 그 기만의 역할로 표면상 우리를 보호하지만, 그래봐야 우리는 버림받고 지지를 잃어 혼자 힘으로 쩔쩔매며 홀로 서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을 벗어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거짓 자아는 두려움 속에 살아간다.
거짓 자아는 수용과 인정에 집착한다. 남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숨막히는 부담 때문에 거짓 자아는 "예"라고 말할 때처럼 확신 있게 "아니요"라고 말할 수 없다.
이 거짓 자아는 어린 시절 우리가 충분히 사랑받지 못하거나 거부당하거나 버림받을 때 생겨났다.
종속된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 필요, 갈망과 단절됨을 뜻한다. 거짓 자아는 종속 관계의 전형이다.
거짓 자아로 살다보면 사람들에게 완벽한 이미지를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긴다. 만인이 나를 좋아하되 아무도 내 실상을 알 수 없도록 말이다.
거짓 자아는 의미의 출처를 찾아 외부의 체험에 매달린다.
거짓 자아는 실상과 거리가 먼 것에 그럴듯한 거짓 옷을 입힌 채 실체를 외면하게 만든다.
거짓 자아는 자신의 공허하고 텅 빈 실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거짓 자아는 실상보다 모양에 매달리므로 결국 '어떻게 보이는가'가 행동기준이 된다.
거짓 자아야말로 나 스스로 되기 원하는, 그러나 존재할 수 없는 인간이다. 하나님은 그에 대해 전혀 아시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모르시는 존재라면 분명 프라이버시가 과한 것이다.
상대의 처지와 상관없이 날마다 그들을 대하는 네 모습이야말로 신앙의 진정한 시험이다.
거짓 자아는 고성능 방어 레이더를 갖추고 있다.
진실을 받아들이는 곳에 평안이 있다. 거짓 자아의 이런저런 면을 끌어안지 않을 때 그것은 적이 되어 우리를 방어적 자세로 몰아간다.
3. 사랑 받는 자
영성이란 생활방식, 곧 믿음의 비전으로 살아가는 삶의 과정이다. 신성함이란 내 참 자아를 발견하고 그것을 지향하며 그대로 살아가는 데 있다.
최고의 영적 성숙이란 '보통 사람', 곧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임을 깨달았다.
너 자신에 대한 정의를 하나님께 사랑 받는 자로 완전히 바꿔라. 네 가치를 구성하는 것은 너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택하심이다.
우리는 단순히 자기 자신이 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우리는 평범한 삶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영적 도취감과 비범한 신비 체험의 추구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삶의 현존 속에서 그분을 만난다.
우리는 단순히 자기 자신이 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하나님은 자신과의 연합을 위해 우리를 지으셨다. 이것이 우리 인생 본연의 목표다. 그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다.
사랑받는 자라는 정체 이외에서 삶과 의미를 끌어낼 때, 나는 영적으로 죽은 것이다.
하나님은 내 삶의 소음 너머로 늘 말씀하고 계셨으나 내가 듣지 못했다 그러나 정적과 고독 속에 서자 내 영혼에서 그분의 속삭임이 크게 들려왔다.
"라르쉬에서 나는 내가 기독교 신앙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음을 아주 분명히 깨달았다. 내 깨어지고 무력하고 연약한 모습 속에서 예수님이 강해지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내게 믿음이 부족함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은 내게 믿음을 주실 수 있다. 내 깨어진 모습을 끌어안을 때 나는 다른 사람들의 깨어진 모습에 동화될 수 있다.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는 것이 아니라 동화되는 것이 내 역할이다. 사역이란 지배가 아니라 나눔이고, 신학이 아니라 이해이며, 교정이 아니라 돌봄이다.
"침묵이란 고독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물이 잔잔해지려면 시간이 걸린다. 마찬가지로 내면이 잠잠해지려면 기다림이 필요하다.
고요한 고독은 나만의 참된 언어를 가능케 한다. 나 자신이 사랑 받는 자임을 느끼지 못하면 타인의 성스러움도 느낄 수 없다. 나 자신과 소원한 사이라면 다른 이들에게도 나는 이방인이다.
4. 아바의 자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최고의 선물은 아바의 체험이다.
주어진 순간 우리가 자신을 보는 시각은 자신의 참 모습과 거의 무관할 수 있다.
애정을 받아들이는 지혜의 삶을 살아라.
"신학적으로 사랑하실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는 것 말고, 솔직히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을 좋아하신다고 믿는가?" 가슴 속에서 "그렇다. 나의 아바는 나를 아주 좋아하신다"라고 답할 수 있다면 당신은 자신에게 애정의 의미에 근접한 잔잔한 긍휼을 느끼고 있는 셈이다.
하나님의 성품의 본질은 긍휼이요 그분의 가슴은 애정으로 정의된다고 성경은 말한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애정의 끈이다. 따라서 내주하시는 성령은 하나님의 긍휼의 지울 수 없는 인(印)이며, 성령 충만한 자의 마음에는 애정이 흘러 넘친다.
예수님의 삶을 보건대, 아바처럼 된다는 것은 곧 긍휼을 베푸는 것이다.
용서를 재촉하는 진실한 긍휼은 원수가 눈물 흘리는 곳을 알 때 자라난다.
버림받은 자들이 눈물 흘리는 곳을 알 때 우리의 무정한 마음은 따뜻한 인정으로 바뀐다.
하늘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온전해진다는 것의 성경적 의미는 곧 예수님의 긍휼의 사역을 본받는 것으로 정의 됩니다.
우리의 애정은 우리가 남들을 위한 존재가 되는 경지까지, 사랑으로 남의 손을 잡을 수 있는 경지까지, 아예 '남'이란 것이 사라지는 경지까지 자라 간다. 이것은 평생의 끊임없는 싸움이다.
"타인은 곧 '나 자신'이다. 우리가 죄 중에 사랑 받은 것처럼 우리도 그를 죄 중에 사랑해야 한다."
"온전함이란 깨어진 자신을 인정하고 치유 받은 상태다."
하나님 나라의 긍휼에는 절대 무차별의 특성이 있다.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 하는 것은 진심에서 우러난 긍휼이다. 경계도 차별도 구분도 분파적 분열도 모르는 애정의 길이다. 하나님의 인간 얼굴이신 예수님은, 참된 제자도의 본질과 아바의 자녀의 생활방식에 대한 깊은 묵상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5. 바리새인과 자녀
"기독교의 도래와 더불어 세계에 퍼진 편협한 사고방식은 기독교의 가장 신기한 특성 중 하나다." [버트런드 러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예수님은 강도나 강간범이나 자객들의 손에 죽으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던 지극히 종교적인 사람들의 깨끗이 씻긴 손에 당하셨다.
누군가를 탓할 때마다 우리는 정작 자신이 연루된 문제에 대해 희생양을 찾는 것이다. 실패와 실수를 통해 자신을 알아 가며 자라려는 것이 삶의 정직한 성찰이다. 그러나 비난은 그것의 방어적 대용품이다. 토머스 무어는 "비난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과오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외면하는 행위다."라고 말했다.
자녀의 특정 행동이 못마땅할 수는 있어도 부모의 사랑은 자녀의 행위에 달린 것이 아니다.
바리새인의 강조점은 언제나 자신의 노력과 성취에 있다. 은혜의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이 으뜸임을 강조한다. 바리새인은 흠 없는 행동을 음미하나 자녀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애정을 기뻐한다.
복음서에 그려진 아바의 사랑 받는 자녀 예수님은 자신의 감정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그것을 거리낌 없이 표현한 한 인간의 모습이다. 인자 예수님은 감정을 변덕스럽고 믿을 수 없는 것이라 하여 경멸하거나 거부하시지 않았다.
감정은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그저 우리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의 진상일 뿐이다. 감정에 반응하는 방식을 통해 우리가 정직하게 사느냐 거짓으로 사느냐가 결정된다.
가면 쓴 자아를 선택하고 자신의 참 감정을 부정할 때 우리는 자신의 인간적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감정은 결국 옹이처럼 굳어진다. 사람들과 삶의 상황에 대한 반응도 억압되어 상투적, 인위적이 된다. 이런 영화(靈化)는 천의 얼굴을 입고 찾아오지만 정당하거나 건강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것은 내면의 자아를 숨막히게 하는 위장이다.
꼬리표는 인상을 만들어 낸다. ~ 인상은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이미지는 고정관념이 되고, 고정관념은 다시 편견을 낳는다.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 편견의 눈으로 사람을 본다. 다시 말해 상대가 더 이상 한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다." [앤서니 드멜로]
6. 현존하는 부활
역사 속의 그리스도가 곧 신앙 속의 그리스도다.
복음의 역동적 능력은 부활에서 나온다.
우리는 밤을 지난다. 어둠은 아침 햇살에 자리를 내준다. 비극은 우리 인생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다. 그러나 연약하고 무력한 상태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현존하는 부활의 능력을 맛본다.
현존하는 부활의식은 직관과 의지, 감정과 이성을 통합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사랑에 미치시고 사랑에 취하신"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구현되어 우리 안에 거하신다.
묵상기도란 무엇보다 예수님의 인격을 바라보는 것이다.
현존하는 부활을 의식하며 묵상할 때 우리는 그분을 닮은 모습으로 빚어져 하나님이 의도하신 인격이 된다.
"훈련이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풀 수 없다. 약간의 훈련만 있으면 약간의 문제를 풀 수 있다. 전폭적 훈련이 있으면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다." [스캇 펫, "아직도 가야 할 길"]
세월이 갈수록 나는 예수님의 현존하는 부활을 의식하는 훈련이 열정의 회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확신이 깊어진다.
7. 열정의 회복
열정이란 말은 본래 '영향을 입는다'는 뜻이다. 열정은 영혼의 본질적 에너지다.
보화를 발견하는 것과 그것을 단호한 결단과 불굴의 노력으로 내 것으로 삼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게으름이란 내면의 여정을 거부하는 태도요 열정을 외면한 데서 비롯되는 마비 증세다. 자신이 깨달은 보화에 깊이 영향을 입지 못할 때 냉담함과 적당 주의는 필연적인 것이다. 열정이 향수나 감상으로 잔락하지 않으려면 그 근본부터 새로워져야 한다.
성경 인물들은 자신의 이력이 아무리 깨끗했든 지저분했든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 예수님께 반응한다. 자의식은 집어 던진 채 그들은 그분께 다가가고, 부여잡고, 뛰어내리고, 달려갔다. 베드로는 그분을 부인하고 버렸으나 그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교회가 인내와 긍휼이 너무 많아 교회를 떠난 사람들 수 미미하다. 그러나 교회에 용서가 없어 교회를 떠난 사람들 수는 비참할 정도로 많다.
8. 용기와 환상
독특한 자의 빈곤이란, 성품을 저버린 흥정만이 유일한 대안인 상황에서 철저히 홀로서야 한다는 예수임의 부름이다. 그것은 내 참 자아의 속삭임에 대한 외로운 긍정이며, 친구와 공동체의 지원이 사라질 때도 내 핵심 정체를 고수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 참 자아가 표출되는 인기 없는 결단을 내리겠다는 용감한 각오다. 그것은 실수도 감수할 만큼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이요 그분의 생명이 내 안에 여전히 고동치고 있음을 십분 믿는 것이다. 그것은 타협 없이, 어떤 고통도 마다 않고 내 참 자아를 독특하고 신비로운 성품의 빈곤에 내어놓은 것이다.
그분은 훌륭한 스승 밑에서 공부하신 적도 없었다. 학위도 없었다. 그분은 평신도였고 교육받지 못한 갈릴리 촌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에는 권위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분은 위대하신 랍비였다. 인성과 신성이 그렇듯 존재와 행위가 하나였기 때문이다.
집안의 주인이 아닌 종의 자리를 택하는 것은 상향이동 문화 속의 하향이동의 길이다. 특권과 명예와 인정의 우상을 비웃는 것, 자신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자신을 대단하게 생각하는 자들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다른 북소리에 맞춰 춤추는 것, 종의 생활방식을 거침없이 받아들이는 것, 이런 것들이 진정한 제자도의 특징적 태도다.
(종말) 우리는 바르게 행하고 따뜻이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면 된다.
죽음에 대한 모든 책과 설교 가운데 직접 경험에서 나온 것은 하나도 없다.
9. 랍비의 심장박동
가장 큰 죄는 죄의식을 잃는 것
겸손이란 철두철미 정직해지는 것이다.
자신의 궁지를 인정하고 팔이 아플 때까지 손을 내밀지 않는 한, 십자가의 랍비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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