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열심히 살아야만이 그나마 사는 것처럼 살게될 것이라는 강박, 아니 세상의 기본에 충실한 내가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라는 거리낌 없음에 사로 잡혔다.
예처럼 역시 이 책도, 이 사람(사노 요코)도 페북의 지우로부터 알게 되었다.
과연 만나보니 걸물이요, 걸작이다.
글의 유려함과, 이야기의 진솔함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동경과 함께 그이의 세계 속으로 훅 빨아들이는 힘이 있다.
그 힘에 이끌려 끄덕끄덕 킬킬대며 읽고 공상하다보니 다 읽게 되었다.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는 그런 책이다.
공감하며 따라가다보면, 아니 끌려가다보면 어느새 지은이의 일상이 나의 일상이 되고 혼자 떨어져 있는 것만 같았던 세상이라는 게 다 비슷한 시간과 공간을 살아 내며 끌끌거리다가 박수를 치다가 회한도 했다가 희망도 했다가 하는 것인게지 하며 짐짓 가벼운 철학가가 된 마냥 미소짓게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번역한 '서혜영'에게 찬사를 보낸다.
그녀의 옮김의 재주는 최고다.
다음은 이 책의 밑줄 친 부분이다.
밑줄이라는 거 시험 공부하듯 답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어 논 것 아니다.
단지, 그 순간 상황과 이야기와 그 속의 언어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
1. 그것은 영원히 구멍일까
(재즈 음악다방의 사람들은) '우리를 이 근방의 녀석들과 똑같이 취급하지 마라'하는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클래식 음악회가 끝나고) 무엇보다 나를 괴롭힌 것은, ~ 오늘의 연주에 대한 감상을 늘어놔야 한다는 강박관념이었다.
어느 날 라디오를 켜고 운전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심사가 뒤틀리고 마음이 불안해지더니 별안간 운전에 자신이 없어졌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내가 듣고 있는 음악의 리듬이 내가 살고 있는 리듬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이것은 어쩌면 내 안에 나만의 음악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발굴되지 않은 금광이 분명해'하고 나는 확신하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젊었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이 금광을 파내어 씻고 정련하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지금은 그냥 놔두자. 나이를 먹고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을 때, 그때 천천히 상대하기로 하자.
그런데 나중에 보니 글쎄 아버지가 식사 때 했던 훈시는 죽어 없어진 게 아니었다. 그냥 통과해 갔다고 여겼던 훈시 말씀은 톳조림과 함께 내 살 속에 녹아 있었다.
(소공녀 주인공에 대한) 지금 이 나이가 되어서야, 나는 어정쩡한 동정심만큼 잔혹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여하튼 아이들조차도 어딘가에 넣어 두었다가 꺼낸 것처럼 설날용 기분이라는 것을 꺼내어 사용했던 것 같다. 그 기분은 그 전 해 설날에도 분명히 사용했던 것으로 기억하는 데, 이번에도 완전히 새롭고 그리운 기분이었다.
어머니가 몸져눕는 일은 거의 없었다. 어머니는 늘 우리를 따뜻하게 비춰 줄 해 같은 존재라고 우리는 생각 했었다.
2. 부지런하고 성실한 인류여
어떤 생활을 하든 창피한 생활이란 건 없다. 그러나 영혼을 책꽂이에 진열하는 것은 창피하다. 시인은 창피하지 않은 걸까. 그 중에서 특히 베스트셀러 시인은.
깜짝 놀랄 정도로 비싸고 깜짝 놀랄 정도로 양이 적어서
나쓰메 소세키가 뭔가에 썼다. "말이 필요 없는 현묘한 경지, 방자한 안정, 노력없는 상상, 무저항의 방임, 목적없이 누워 있기,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편안해지는 권태"
나에게는 기계라는 것이 어쩐지 동물 같고, 인간 같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개다. 충실한 개가 불평도 하지 않고 가만히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면 그것과 나 사이에 감정이 오간다. 그것이 고물차가 되면 별안간 나 자신도 지친 중년 여자가 되어 서로 동정하고 공감하며 인생의 비애에 눈물짓는다.
인간에겐 버릴 수 없는 허영심이란 것이 어딘가에 달라붙어 있다.
3. 여러 종류의 사람과 함께 영화를 봤다
우리는 내일도 살아가야 한다.
쩨쩨한 인생을 좀스럽게 살고 있는 나는 부러워했다.
나는 영화를 해피엔딩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누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빈자와 부자, 추녀와 미인, 행복과 불행, 리얼과 거짓된 것, 어떤 생활이 계속되든 끝나든, 사람의 일생이란 그 안에 모든 것들을 모두 뭉뚱그려 갖고 있으며, 진흙투성이 거적이든 얼룩 하나 없는 비단 옷에 싸여 있든, 사는 것은 아름답다고, 핏덩어리를 토하며 죽는 몰리에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엄숙하게 느꼈다.
경박한 내가 깨달은 것은, 인간이 극한에 이르러서 추구하는 것은 먹을 것과, 먹을 것과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문화라는 것이었다. '몸과 정신'이라는 건가.
4. 1만 번 회전하는 세탁기
"그런데 말이야, 사람이란 남의 불행을 보고 자신의 행복을 확인하고 싶은가 봐. 자기보다 불행한 사람이 있으면 안심이 되나 봐."
문득 떠오르는 것은 이타심, 차차 떠오르는 것은 이기심. 이타심은 없는 것보다는 있는 편이 좋다. 그러나 이타심만으로는 불편하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재능도 없는 주제에 노력도 하지 않고 머리는 노화되어 갔다. 그런데도 나는 또다시 영어를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다. 디스 이즈 어 펜을 시작한 거다. 스스로도 정말 어이가 없다. 뭐랄까 이제 버릇 같은, 부스럼 같은, 지병 같은 디스 이즈 어 펜이다. "발음의 기초가 안 돼 있네요" 하고 미국인 교사는 내 입을 보고 일본어로 슬피 말한다.
나는 때때로 주는 생선에 미칠 듯이 기뻐하는 고양이를 보면서 역시 '행복'은 현실 생활 속에 어쩌다 등장해야 하는 거야, 내가 우리 집 고양이는 제대로 키운 거야 하고 결론 내리는 독선적인 주인이다.
그러나 오로지 일상이란 것으로부터 울고 싶을 정도로 마구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다.
이제 나는 수첩에 쓰기 때문에 더욱 잘 잊게 됐다.
5. 멋쟁이 같은 거 난 모른다
사람들은 모두 적절한 시기를 놓치고 나서야 여러 가지 것들을 이해하게 되는가 보다.
얼굴을 씻으려고 보면 수건이 평행사변형으로 뻣뻣하게 뻗어서 수건을 세운 채 걸어서 세면장으로 갔다.
그런데 이것은 나에게 요리책이라기보다 행복한 상류 가정 소설 같아 보였다.
표현이 곧 자만이 되어 버리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불운한 오리가 아름다운 백조로 성장한다고 하는 것에 순순히 감동한 어린 날의 나와 "오리한테 미안하잖아"하고 느끼는 아들과, 둘 중 어느 쪽이 더 따뜻한 마음을 가진 건지 나는 모르겠다.
나는 어머니에게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와 닿지 않았다. 어머니는 처음부터 어른으로 내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6. 외국어는 멋있는 음악이다
(가난해서 싼 곳을 찾아다니다 보니) 나는 싸면서도 맛있는 레스토랑을 맞추는 데 명인이 되었다. 비결은 미묘하게 불결한 가게를 찾는 것이었다.
7. 독서는 나태한 쾌락이다
여자가 한 번 어머니가 되어 버리면 어머니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어머니의 사랑에는 자식을 향한 지칠 줄 모르는 지배욕이 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의 사랑은 애지중지 키우고 무한히 보살피는 무상의 사랑이다.
(만화 속의) 그 주인공은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소년도 아니고 소녀도 아니다. 그 모습은 사실 여성 속에 있는 '사랑'과 '성'이란 것이 가면을 쓰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책을 읽으면서 초조해 하지 않는다. 내가 나를 알았다고나 할까. 더 이상 아무 인물에게나 나를 일치시키려 노력하지 않는다. 나도 세월의 흐름과 함께 나의 '입장'이 생긴 것이다.
8. 수화기를 붙들고
나이를 먹는다는 건 뭐랄까, 한없이 유년으로 돌아가는 거다. 나고 자란 어릴 적 경험이 차차 거대해져서 이빨을 드러내는 거다.
무지 청명한 가을날에는 왠지 사람이 그립다.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할머니가 되는 게 아니라, 스물네 살의 자만에 찬 젊은 시절부터 이미 서서히 할머니가 되기 시작하는 거다.
나는 나인 채로 할머니가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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