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17(토)
주님의 은혜로 또 하루를 맞이합니다.
감사와 불안이 어김없이 찾아 옵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다른 나 입니다.
고개저어 불안을 밀어냅니다.
감사의 주님과 QT를 합니다.
감사의 주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어라! 기도 톤이 좀 강해졌습니다.
주님, 저 지금 주님께 짜증 부리는거 아닙니다.
감사의 주님과 운동을 합니다.
나름 정해논 세트를 진행합니다.
내 몸의 상태는 이제까지중 최상입니다.
감사의 주님과 몸을 씻습니다.
감사의 주님의 은혜로 머리와 마음도 씻겨집니다.
감사의 주님과 성경타자통독을 합니다.
감사의 주님과 요셉을 만납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사브낫바네아'라는 이름을 줍니다.
그뜻은 ① 하나님께서 말씀하심, 그리고 그 이름의 소유자가 살리라
② 생명을 부양한다. 입니다.
"생명을 부양한다."
가장의 기본적인 의무에 붙들립니다.
숨이 막힙니다.
.....
다시 감사의 주님을 바라봅니다.
계속 요셉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꿈꾸는 자'에서 '꿈을 해석하는 자'로
'꿈을 해석하는 자'에서 '꿈을 이뤄가는 자'로의 변화를 만납니다.
요셉이 흉년 전에 두 아들을 낳습니다.
큰 아이는 '므낫세', "하나님께서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작은 아이는 '에브라임',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주님께 물었습니다.
"왜! 흉년 전에 아들을 얻는 기쁨을 주신건가요?"
요셉의 마음도 지레짐작하며 요셉에게 묻습니다.
"흉년이 올 것을 알고있는 상태에서 두 아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어땠어?"
감사의 주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이 지점이 저와 다른 점이군요"
주님이 다시 묻습니다.
"뭔데?"
제가 대답합니다.
"부양이요"
나는 이 단어에 떳떳하지 못합니다.
나는 이 단어의 범위를 넘어선적도 없습니다.
선택이 필요할 때마다 이 단어가 기준이라 핑계했었습니다.
기다림이 필요할 때마다 이 단어가 기다림을 방해한다고 핑계했었습니다.
어쩌면 지금의 시련은,
부양을 '가장의 의무의 범위'에서 '만민의 생명의 부양자'로의
훈련일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감사의 주님을 바라봅니다.
풀지 못했던 단어 퍼즐이 자리를 찾아갑니다.
그래!!
(하나님의 영에) '감동'이 먼저야,
다음은 '형통'이지.
깨달음만큼 주님의 때에 더 가까워진
하루를 마무리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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